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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지은 Jan 21. 2023

다시 책을 주문하며


강릉에 온 지 한 달 반정도 지났다. 시간은 속절없이 잘도 흘러간다. 올해는 어떤 계획을 세우고 보낼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지만 결국엔 계획을 세우지 않기로 하였다. 그냥 마음이 가는 대로 할 수 있는 것을 하다 보면, 연말이 되면 뭔가는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계획을 세우고 노력해도 안될 일은 안되고, 세상사가 억지로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살면서 알게 되었다. 한해 정도는 무계획으로, 마음 가는 대로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난 늘 새해에는 나름 계획을 세웠다. 그 계획에 맞추어 생활을 하다 보니, 사는 일이 여간 팍팍한 것이 아니었다. 늘 긴장의 연속이었고, 계획한 일들이 조금이라도 빗나가면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불안하고 짜증이 났다. 이렇게 의지가 약해서야,라는 자책과 함께. 그렇다고 뭐 그리 원대한 포부를 갖고 커다란 계획을 세우는 것이 아님에도, 일이 안되었을 때 오는 회의감은 꽤 컸다.


며느리 보는 것으로 인생의 숙제를 다 했다는 느낌이 들었던 작년 연말 이후 마음은 많이 편해졌다. 욕심을 부리지 말고, 아이들이 잘 되기만 기도하며, 가슴 따뜻한 부모가 되고 싶다.

오늘처럼 진눈깨비가 오는 날이면 잿빛 바다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낸다. 하얗게 거품을 이어가며 집채만 한 파도를 내놓는 바다를 바라보다 문득 책 주문이 하고 싶어 졌다. 집안에 있어야 하면 지금 제일 잘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읽고 쓰는 것.” 인터넷 신문에서 보았던, ‘2022년을 대표하는 20선’을 다시 찾았다. 모 일간지에서 선정한 것이었다. 그중 가지고 있는 책들을 제외한 몇 권을 주문했다. 하얼빈, 아버지의 해방일지, 오 윌리엄, 하쿠다 사진관, 이토록 평범한 미래, 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 등등. 파친코, 작별인사,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와 달라구트 꿈 백화점은 이미 가지고 있다.


책 주문 후에는 책상에 앉아 스탠드를 켜고 읽던 책들을 다시 이어서 읽는다. 작은 스탠드를 켜면 마음은 바깥의 잿빛 풍경 속에서도 포근한 빛에 젖는다. 지난주에 읽었던 어떤 책에서 보니 ‘책을 열 권쯤 선정해, 각각 다른 책을 하루에 10페이지씩 읽는다. 그러면 하루에 100페이지의 책을 읽을 수 있고, 각각 다른 책을 읽고 있기에 지루하지 않고, 책들 간의 시너지 효과도 가지고 올 수 있다’고 했다. 실험적으로 우선 난 4권의 책을 골랐다. 고전인 ‘폭풍의 언덕’, 이해인 수녀님의 ‘기다리는 행복’, 이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 그리고 잡지, <좋은 생각>이다.


힘들게 페이지를 넘기는 폭풍의 언덕은 이번달에 읽고 독후감을 내야 하는 독서클럽의 숙제이고, 이해인 수녀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았던 친필 사인이 된 책은 매일 좋은 기도를 하나씩 만나는 것 같아 감사하다. 그리고 여행의 이유, 해마다 길고 짧은 여행을 자주 하는 나는 작가의 시선에 동감하며 페이지를 넘길 수 있다. 그 사이사이마다 고소한 양념 같이 읽히는 <좋은 생각>의 순수한 이야기들. 삶의 다른 모습들을 배우고, 편안함을 알고, 쉬어 가는 법을 배운다.

우울해질 수도 있는 휴일 오후. 책 주문을 하고, 읽고 있는 책들의 페이지에 밑줄을 긋고, 여백에 메모도 하며 책장을 넘긴다. 따듯한 허브 차 한잔과 달콤한 과자 봉지를 부스럭거리며 자판기를 두드리는 손끝의 리듬이 제법 빠르다. 가끔은 이렇게 마음이 가는 대로 해보는 것이, 편안해지는 시간들을 만나는 방법이리라. 독서를 하다가 졸리면 따뜻한 전기장판 위에서 이불을 끌어올리며 긴 호흡을 좀 해봐야 하겠다. 그러다가 그대로 잠이 들면 또 어떻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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