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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지은 Apr 28. 2022

미국에 살며 한국 책을 사 모으는 이유

종이 책이 주는 기쁨


                

'난 얼만큼 미국인처럼 생활하고 있을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도 되는 이곳 생활이 참 편안하지만 문득, '난 왜 여기에 있을까? 왜 돌아가지 않고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면 종일 힘들 때도 있다. 


나이가 들수록 깊어지는 고향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 심한 갈증 같기도 하다. 두고 왔다고 느끼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은 늘 가슴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 한국보다 미국에서 살아온 날들이 훨씬 더 길어지면 없어질 것 같아지만 사라지지 않는 감정들. 찬바람을 이고 섰던 겨울의 모습들이 동네를 걷다가 만나는 완연한 봄 소리는 또 두고 온 곳을 그리워하게 한다.


               

    


웃자란 푸른 잔디는 청보리가 익는 늦봄처럼 사브작 사브작 잎새를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내 곁을 찾아오고, 이미 한국에서는 꽃눈이 되어 떨어져 버렸을 벚꽃들이 만개한 동네 어귀에선 두고 온 시간들의 초봄은 어땠을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소식이 궁금한 어린 시절 친구들처럼. 풍경 속의 색깔들이 짙어지고 산정도 하얀 눈 옷을 내려놓고 푸른색이 되면 시선은 산너머 그곳을 향한다. 어느새 그리움은 눈물이 되어 흐르고.

       

산 넘고 바다 건너 그곳. 마음만 먹으면 어느 때라도 갈 수 있긴 하지만, 두고 왔다고 생각이 들면 한없이 먼 곳.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쉬어진다. 






서둘러 안으로 들어와 내방을 찾는다. 둘러보면 이곳엔 그리움이 가득 모여 있다. 


미국에서 대학도 다녔고, 병원에서 일을 그렇게 오래 했는데도 변변한 전공 서적 하나 꼽혀 있지 않은 내 책장. 퇴직을 하며 다시는 돌아보지 않을 것처럼 의도적으로 전공 서적들을 빼서 버렸지만 좀 심하다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영어로 쓰인 책들이 없다. 


그러나 그리움이 가득한 모국어로 쓰인 책들에게는 전자책으로 읽으면 안 될 것 같은 강박 비슷한 것이 있다. 종이책을 읽으며 밑줄을 긑고, 포스트잇을 붙이며 책장을 넘길 때마다 묻어나던 그 파릇한 그리움. 어느 시간인가부터 그렇게 모국어로 쓰인 서적들은 내 책장에 있게 되었고, 살면서 고향이 생각날 때마다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한국 책들을 읽고 있으면 편안해지던 마음. 놓치지 않고 있었던 그리움들. 그렇게 읽은 책들을 책장에 두었고, 세월이 지나자 나의 울타리가 되었다. 


책장에서는 강릉 바다의 시 한 편이, 자전거를 타고 하는 여행이, 이민자의 거친 소리가, 개나리 폭포가 연초록 차밭으로 쏟아지는 섬진강변의 풍경이, 라면을 끓이는 모습이, 연필로 쓰는 이야기들이 나온다. 조용히 내 손을 잡아주거나, 내 어깨를 다독이며 말을 걸어준다.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 조차도 의연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서서 삶은 다 그런 거라고 알려 준다.





     


모국어로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며, 마중물을 부으며 펌프질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언젠가 했던 것 같다. 펌프질은 책이 한 권씩 늘어 갈 때마다, 시와 에세이, 소설과 자서전, 고전으로 이어지며 계속된다. 


일 년에 서너 번 책을 산다. 주로 미국에 있는 한국 인터넷서점을 이용하지만 간혹 한국에서 미국으로 들어올 때 사 오기도 한다. 트렁크 속 책이 수화물 허용 한도를 초과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들고 오면 한동안은 갈증을 덜 수 있어 기꺼이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렇게 모아진 책들 속에서 난 그리움을 달랜다. 책장에 꼽히지 못한 월간지나 전집 등은 차고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세월의 먼지를 고스란히 뒤집어쓰고 있지만 차마 버릴 엄두를 내지 못한다.


요즘 나의 관심은 고전이다. 세기를 통해 읽혔던 책에는 분명히 그 이유가 있을 것이고 더 나이가 들기 전에 공부처럼 해보고 싶은 독서이기도 해서. 몇 권의 고전을 얼마나 더 계속 읽을 수 있을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공부를 열심히 해 보고 싶은 욕심은 있다. 세월을 통해 만들어진 나의 울타리 안에서 그리움을 조금씩 덜어내는 작업. 어깨가 더 굽기 전에, 눈이 더 침침해지기 전에, 아직 컴의 자판기를 두드리는 손이 그런대로 쓸만할 때 계속 이어가 볼까 한다. 그리움이라는 봄꽃을 가슴에 한가득 안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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