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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지은 Feb 06. 2022

설국에 갇히다

콜로라도 이야기

      

                          




대설 주의보가 내린 건 어젯밤이었다. 창 밖은 눈으로 하얗게 변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이 떠올랐다. 늘 조용한 동네이긴 하지만 하얀 밤은 눈에 덮이며 더 고요한 것처럼 느껴졌다.  새벽잠이 깨 블라인드 사이를 열고 보니 눈은 계속 내리고 밤새 내린 눈은 언뜻 보아도 무릎까지 찰 것 같았다. 

               

이곳 콜로라도로 이사를 온 것은 15년 전쯤이다. 이삿짐이 도착하던 그날은 추수감사절 며칠 전이었는데, 눈이 왔다. 짐을 옮기는 사람들은 미끄러질까 걱정을 하고 남편은 신발을 신고 짐을 옮겨 집안을 더럽힐까 봐 걱정을 했다. 그러나 난 오랜만에 만난 눈에 신나서, 강아지처럼 눈을 맞으며 마당을 돌아다녔다. 


큰 짐들을 제자리에 놓고 트럭은 떠났다. 난 눈 속에 묻혀 작은 짐들을 정리했다. 얼마 만에 만난 고요한 나만의 시간인가 싶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동네에서 새로운 시간들을 살아내야 한다는 불안감마저 희고 포근한 눈 이불속에 감추어졌다. 종일 전화 한 통 오는 일이 없었다. 이런 고요가 바로 침잠이구나 싶었다.


일주일이 지나도 전화 한 통 걸려 오지 않았고, 덕택에 그 많은 이삿짐은 며칠 사이에 정리가 되었다. 나는 휘파람을 불며 위층 아래층을 오르내렸다. 청소까지 마치고 나서 밀린 글쓰기들을 마주하고 앉았다.  샌프란시스코 한국 일보에 칼럼 하나를 이어가던 시기였고 2주에 한번 글을 싣고 있었다. 글을 쓰는 컴퓨터 자판기 두드리는 소리가 집 전체에 잔잔히 울려 퍼졌다. 


그때, 멀고 낯선 곳으로 이사를 준비하고 새집을 사 새로운 둥지를 옮기는 일로 몸도 마음도 심란했었다. 남편은 그 해 여름부터 먼저 가 있었던 상황이었고, 혼자 남아 처리해야 일들은 산적해 있었다.  2주일에 한번 쓰는 글도 벅차, 마감에 쫓기기가 일수였다. 자정이 되어서야 첨부 파일이 달린 이메일을 보내며 늘 미안했었다.


그러다가 맞은 혼자만의 시간. 너무도 오랜만에 혼자를 즐기는 시간이었다. 달리듯 글을 썼고 몇 달치의 글이 써지자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었다. 그렇게 몰아치듯 글을 쓰는 습관은 아직도 남아 있어, 글을 쓴다고 컴퓨터 앞에 앉으면 종일 자판기를 두드리는 날도 있다. 허리도 아프고 손목도 아프고 눈도 침침하고, 그래도 악습은 버리지 못하는 것 같다. 





겨울 마당은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작은 안개꽃처럼 눈꽃을 이고 섰고, 오래된 노송들은 활짝 핀 흰 국화 송이를 만개시켰다. 허리가 아프도록 눈을 치우면서도 설국 열차를 상상했고, 눈이 덮여 하얘진 밤을 즐겼다.


한 달쯤 지났을까, 겨울은 점점 깊어갔다. 설국의 열차는 더 깊은 곳으로 향해 가고 고요가 주는 시간의 쓸쓸함도 짙어갔다. 남편은 출근을 하고 난 아직 새로운 직장을 찾지 않고, 혼자의 시간을 얼마나 더 즐길 수 있을지 시험을 하는 중이었다. 채 한 달도 안돼, 고요는 뼛속까지 차갑게 스며들었다. 외로움과 고요가 한꺼번에 밀려와 겨울을 더 쓸쓸하게 만들었다. 더 시리기 전에 그만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동네에 있는 2군데의 병원에 새로 다듬은 이력서를 넣고, 한인 성당을 찾아갔다. 연말 즈음이었다. 


1월 3일부터 출근이 결정되었다. 혼자 즐기던 시간을 내려놓으며 낯선 이들 사이로 성큼 발을 들여놓았다. 성당에서 만나는 새로운 얼굴들, 이웃들, 병원의 동료들. 성급한 마음으로 봄을 기다리며 역시 사람은 서로 어우러져 살아야 함을 배웠다. 시간이 흐르며 설국 열차는 먼 곳으로 기적을 울리며 떠나갔다. 만개했던 눈꽃들도 서서히 졌다.


다시 전화벨이 울리고, 동네의 개 짖는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가끔 아침을 깨우는 새소리 들도 정겨웠다. 아침에 산책을 하다가 이웃을 만나 인사하기도 하고, 그렇게 사람들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어젯밤에 시작된 겨울 이야기도 내일이면 눈을 그친다는 일기 예보를 들으며, 오늘의 고요함도 하루가 못 가겠구나 싶다. 하루 만에 다시 만날 사람 사는 이야기. 설국을 기억해 냈던 옛날의 추억들도 하얀 솜이불 속으로 밀어 넣고 또 다른 내일을 기다린다. 봄을 기다린다. 성급한 마음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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