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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지은 Aug 03. 2023

내일 돌아가요.                

그날의 기억


                이번 한국행은 남편과 동행이었다. 마음은 든든했고 무거운 케리어도 부담 없이 들 수 있었다. 공항에서 혼자 지루하게 기다리던 시간에도 옆에 같이 있으니 심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슨 이야기를 끝없이 주고받는 것은 아니다. 나도 남편도 별로 말이 없는 타입이라 그냥 무덤덤하지만  장모님이 자신을 더 못 알아보기 전에 몇 번이라도 다녀와야 하겠다던 남편이 고마웠다. 긴 비행 끝에 강릉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시차가 적응이 안 돼 토끼잠을 자고 난 후 새벽 5시부터 송정 솔밭을 나가 걸으면서도 “날 알아는 보실까? 알아보셔야  할 텐데…”라는 혼자 말을 몇 번이나 했다. 9시 정각, 보건소에서 코로나 PCR 재검을 받으며 별일은 없겠지? 하며 걱정했다. 그 당시는 입국자 전원에게 24시간 안에 재검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오후 2시, 문자로 경과가 왔다. 둘 다 음성. 바로 요양원에 전화를 걸어 면회 약속을 잡으며, 떠나기 전에도 한국에 들어와서 한 재검도 모두 음성이라고 알려드렸다.

                집 앞 마켓에서 과일과 요구르트를 사서 택시에 올랐다. 요양원의 면회장소는 건물 밖에 설치된 텐트 아래 였다. 봄바람이 신선한 밖에서의 만남이었지만 우리 모두는 마스크를 끼고 손에는 일회용 장갑까지 끼고 있었다.

“엄마, 엄마, 엄마.” 숨 넘어갈 듯 부르자, 옆에 있던 남편이 한마디 했다.  

“ 숨 넘어가겠다. 그렇게 다급하게 부르면 엄마가 놀래시잖아?”

아~ 그렇구나. 급한 나의 성격은 엄마를 빨리 부르고 엄마가 날 알아보시는지가 제일 중요했다. 엄마는 많이 수척해 지셨다. 추위를 많이 타시는 엄마는 무릎에 담요까지 덮으시고 두꺼운 겨울 양말을 신고 휠체어에 앉아 계셨다. 나의 애타는 부름에도 ‘누군가?’ 하는 표정이시다.

“엄마, 이 사람 누군지 알아?”  남편은 쓰고 있던 마스크를 내린다. 그래도 엄마는 표정이 없다. 이 사람 엄마 사위잖아, 를 한 열 번쯤 외치자, 그제사

 “우리 사위는 전 남인인데….”라고 하신다. 아직 이름은 기억하시는구나. 이름을 말하자 남편은 아이처럼 좋아하며 손뼉을 쳤다. 자기의 이름을 아직 잊지 않으신 장모님이 감사한 걸까. 무남독녀를 데려다 이국에서 살며 돌아오지 못한 미안함 때문일까? 엄마는 한 번도 누구의 탓을 하지 않으셨지만 남편의 박사 학위가 끝나고 포스트 닥터까지 마치고도 돌아오지 않자, 해마다 신년이면

 “올해도 안 들어오나?”라는 말씀을 근 20여 년 하셨다. 진작에 영주권을 받았고, 미국에서 생활에 틀이 잡혀 갔지만 엄마의 희망이셨던, 우리가 돌아와 옆에 사는 일은 한 번도 못해 봤다. 가끔 나의 절친을 만나면 “갔다가 안 온다 했으면 절대 안 보냈지. 갔다가 공부하고 온다니까…”라고 말씀을 하셨단다. 마침 친구의 딸도 미국으로 일 년간 연수를 떠났었는데,

“속지 마. 가면 안 와. 왜 보내려고 그래? 안 온다니까… 보내지 마…”라고 신신당부하셨단다.

친구의 딸은 미국에서 일 년 연수를 잘 마치고 한국에 돌아가 좋은 병원에서 유능한 의사로 잘 근무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엄마의 희망고문이 되어 세월만 지냈다. 처음 결혼을 할  때는 아들 많은 집의 차남이어서 점수를 좀 더 많이 받았었다면 나의 이기적인 생각일까. 엄마의 친구들도, 우리 친척들도, 나의 친구들도, 나는 엄마와 같이 혹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모시고 살 꺼라고 생각했다. 특별히 효녀가 아니었음에도 어렸을 때부터 세뇌교육이 잘 되어 있어, 당연히 모시고 사는 걸로 생각을 했고, 시댁에서 조차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남편은 늦깎이 유학생이 되었고 난 미국 간호사 시험에 합격하고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며, 미국의 생활이 점점 편해지게 되었다. 아들은 미국아이로 자랐고, 아이를 데리고 한국에 나와 치열 맹모가 될 자신이 없었다면 나의 궁색한 변명일까. 엄마를 모셔야 한다는 생각은 늘 갖고 있었고 엄마의 영주권을 신청해 ‘미국에 사는 연습’을 하러 오시기도 했다. 그러나 둘 다 일을 나가고 종일 집에 혼자 계셔야 했던 엄마는 ‘이게 창살 없는 감옥’이지, 하시곤 3달 만에 다시 보따리를 싸셨다. 그리고 난 한번 해 보았다며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그 이후 엄마는 다시는 미국에 오지 않으셨다. 10년도 넘은 일이다. 그리고 난 직장에서 퇴직을 했고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자 더 자주 강릉에 왔고, 그것으로 엄마에게 할 일을 다했다는 짧은 생각을 했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옛말 하나도 틀리지 않다. 엄마는 평생 딸 하나만을 위해 사셨는데, 난 그냥 일 년에 한두 번 삐죽 갔다 오는 것으로 내 의무를 다 했다고 생각했다. 가 있는 동안도 친구 만나고 여행 다니고 집에 있는 날이 며칠 안되었으니, 엄마는 딸 하고 긴 이야기 나눌 시간도 별로 없으셨다.

                우리 엄마는 단단하고 별 아프신데도 없으니 백수를 하실 거라며, 혼자 지내시는데 별 문제가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던 것은 나의 얼마나 모순되고 이기적인 생각이었을까. 엄마도 연세가 드신다는 걸, 구순이 넘으셨다는 걸 모른 건 아닌데도 전화 통화로 ‘별일 없다’고 하시면 그걸 고지 곧대로 믿었으니 말이다.

그러던 어느 봄날, 엄마는 집에서 넘어지셨고 나는 급하게 한국으로 들어와야 했다.  더 이상은 혼자의 생활이 안될 것 같아 집에서 간병인을 두고 모셔 봤지만 겨우 한 달 만에 난 지쳤다. 그리고 이건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며 요양원에 모셨다. ‘해 보았다’는 것으로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었고 가슴을 치며 후회를 했지만 시간은 이미 저만치 가고 있었다. 좀 더 일찍 나와 좀 더 길게 함께 했더라면 하는 후회는 명치끝에 계속 매달려 있었다. 더구나 코로나 사태로 여행에 제한이 많아지자 어쩌면 엄마를 요양원이라는 안전한 곳이 모셔 두고 온 것이 잘한 일 같다며 위안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엄마의 치매는 진행적으로 나빠져 갔다. 처음에는 카톡 비디오 통화로 얼굴을 알아볼 수는 있었는데 점점 그것도 안되었고 전화통화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러자 사위는 마음이 급했던지 이번엔 꼭 같이 가자고 했다.

“장모님, 제가 누군지 아세요? 민석 아빠잖아요?” 그렇게 조용히 이야기해가지고는 안된다며,

“엄마 이 사람 누구야? 알겠어??”를 열 번쯤 하자 쳐다본다.

그리고 의아한 표정이 된다. 당신이 생각했던 사위는 그 옛날의 젊은 대위였는데, 웬 할아버지가 당신을 보고 장모님이라니… 그리고 한참 무슨 생각을 하시더니

“원주에서 왔나?” 하고 모기만 한 목소리로 물으신다. 처음 신혼살림을 차렸던 그곳을 기억하시는 거다.

“네. 원주에 살던… 지금은 미국에서 왔고요.” 남편은 그래도 장모님이 자기의 이름은 기억하는 것에 좋아서 어쩔 줄 몰라했다. 그리고 거의 매일 면회를 갔다. 열흘쯤 연속으로 면회를 가자 엄마는 나는 확실히 알아보시고 사위는 가끔 알아보셨다. ‘그래, 이렇게 얼굴을 보여 드리고 몇 마디라도 이야기를 나누면 기억이 돌아올 거야.’ 남편은 상당히 고무되어 있었다.

그러나 짧은 일정 안에 친구들도 만나야 하고 여행도 며칠 해야 하고 그러다 보니 또 며칠 면회가 뜸해졌다. 그리고 다시 면회를 갔을 땐, 역시 못 알아보셨다. 실망했겠지만 표현을 안 하는 무덤덤한 남편에게 내가 대신 미안했다.

“아, 우리 사위”하며 반가워해 주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남편이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떠나기 전 면회를 갔다.

“내일 저는 돌아가요. 내년에 또 올 테니 잘 계셔야 해요.” 아무런 말이 없던 엄마는 한참 있다가 겨우 한마디 물어보신다.

 “니도 가나?” 그 한마디에 가슴이 미어진다.

사위는 가도 되지만 딸은 더 잡고 싶으셨던 것일까. 얼마나 곁에 두고 보고 싶고, 잔소리도 하고 싶고, 같이 여행도 하고 싶고, 맛있는 것도 같이 먹고 싶고, 지인들에게 우리 딸과 사위야 하면서 자랑도 하고 싶으셨을까. 그런 엄마의 평생의 마음을 알면서도 하지 못한 죄책감이 지금 이 시간, 그렇게 커다란 바위가 되어 내 마음을 누를지는 몰랐다.

남편이 돌아가고 혼자 면회를 가면서

“엄마, 나도 낼 가는데 또 올게요.” 그 이야기를 해야 할 시간이 올 텐데, 그 말이 소리가 되어 나와 줄지 알 수가 없다. 목울대 저 아래에서 가시가 되어 오랫동안 걸려 있을 것 같다.



엄마가 요양원에 계시던 그 어느 날의기록이다. 오늘 아침 저장되어 있던 글에서 찾아오며 또 눈물을 흘린다. 언제쯤 편해 질 수 있을까? 답은 알수 없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되는 내 마음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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