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임종 후 남편이 도착하는데 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주말이기도 했고, 급하게 비행기 표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최대한 빨리 올 수 있는 날짜는 5월 4일 새벽 도착이었다. 콜로라도 집에서 출발은 월요일이었지만 한국과 시간 차이가 있었고 그곳에서 인천까지 직항 편은 없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서부 연안의 어느 대도시에서 환승을 해야 하고, 인천 공항에 도착한 후에도 강릉까지 와야 하는 거리와 시간. 참으로 먼 길이었다.
성당의 연령회와 장의사와 상의를 하고, 일단 장례 예식을 좀 뒤로 미루기로 결정하였다. 엄마를 영안실에 모셔 놓고 집으로 온 첫날.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을 기다린다는 것이 그렇게 힘들 수가 없었다. 그냥 연도책을 펼쳐 놓고 계속 기도 만을 이어갔다. 창밖으로 어둠이 내리자 마음은 떨렸고 누군가 옆에 있었으면 싶었다. 그 마음을 아는지, 절친은 전화를 걸어왔다. 내 물기 어린 대답에, ‘지금 갈게’ 하고는 끊었다.
친구가 왔다. 마음속 떨림이 조금 덜어진 것 같았다. 장례절차 이야기를 나누고, 엄마는 좋은 데 가셨을 거라는 말로 스스로 위로를 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얼마를 뒤척였을까. 아버지 생각이 났다. 이 기회에 엄마와 아버지를 같이 모시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 아버지는 선산에서 벌써 6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봉분, 그 안에는 거의 흙으로 돌아가 계실지도 몰랐다.
다음날 아침, 장의사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의 장례 기간 동안 아버지의 묘도 개장을 하고 싶다고, 가능한지 문의했다. 정확한 장소만 알면 가능하다고 했다. 개장을 할 경우 가장 좋은 시기가 배우자의 장례 기간이라는 이야기도 덤으로 해주었다. 밤을 같이 지내 준 친구도 내 통화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무언의 긍정.
마침 사촌 동생이 장례 첫날부터 온다고 했으니, 그를 앞세워 선산에 가서 아버지 묘를 개장하기로 했다. 이 결정도 오롯이 내가 한 결정이다. 무남독녀 외동딸. 아들이 없는데, 엄마를 선산의 아버지 옆에 모신다고 해도 앞으로 누가 돌봐 드릴 것이며, 미국에 사는 아들이 산소를 돌보러 나올 상황도 아니다. 사촌들도 모두 본인들의 생활에 바쁜데, 한식에 벌초하고, 추석 때 성묘를 얼마나 더 계속할 수 있을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실행을 해야만 했다.
엄마를 화장하고, 아버지 묘를 개장해 수습하고 미국에서 납골당에 모셔 두고, 내가 보고 싶을 때, 울고 싶을 때, 만나고 싶을 때 찾아가 보려고 한다. 한국의 납골당은 한번 계약을 하면 15년마다 3번 연장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45년 후면 어차피 사라질 공간이다. 앞으로 45년 후까지 내가 살아 있어 납골당을 와 볼 수 있는 가능성은 제로이다. 그에 반해 미국의 납골당은 100년 정도의 보존이 가능하다. 외손자와 그 후손들이 혹시 살펴볼 가능성이 더 많다. 그 가능성이 더 많은 쪽에 무게를 두고 실행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남편이 도착에 맞추어 장례 절차는 시작되었다. 초례를 지내고 성당의 연령회에서 제대를 꾸미고 연도를 시작하였다. 그 시간에 맞추어 사촌과 작은 어머니도 도착하셨고, 간곡하게 나의 의견을 말씀드렸다. 처음에는 좀 서운해하셨지만 딸이 결정한 일인데… 하는 수 없지, 하고 생각해 주셨다. 선산은 동해시 무릉계곡 입구에 있다. 그곳까지 사촌이 동행했고 장의사는 아버지의 묘를 개장해서 작은 뼈 조각들을 수습해 오셨다. 한지를 준비해 주었고, 미국까지 가는 무게를 생각해 가장 가벼운 유골함을 사용했다. 아버지와 엄마. 두 분의 유골함을 받아 들고 이제는 두 분이 영원히 함께 하실 것을 안다. 내 손으로 준비한 것이니까.
오월, 가정의 달.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부부의 날이 이어지며 가정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오월 한 달. 처음으로 두 분이 함께 하는 어버이날이고, 함께 하는 부부의 날이다. 서로 따뜻한 손을 잡고 천상에서 만나 그 오랜 회포를 푸시며 지난 이야기 두런두런 나누고 계실 것 같다. 딸 하나 잘 둬서 비행기도 타고 미국까지 오지 않았냐고 농담도 하실 것 같다. 이 쉽지 않은 결정조차 내게는 최선이라고 믿는다. 선산에 두 분을 모신 후, 훌쩍 미국으로 돌아가면, 그 후의 나의 마음은 또 얼마나 힘들까. 계절이 바뀔 때마다 다른 사람의 신세를 져야 한다는 부담을 덜기 위한 결정이었고, 내가 살고 있는 콜로라도, 풍광이 수려한 록키 산맥 자락에 모셔 놓고 따듯한 숨결을 느끼며 남은 인생을 살고 싶다. 오월의 포근한 햇살로, 오랜 그리움의 향기는 농익으며, 우리 가정 안에서 함께 해 주실 것이다. 마음속엔 카네이션 다발이 가득 피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