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괜찮은 건지 알 수 없다. 그냥 힘들었고, 먹먹했고, 무슨 말들을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준비되었다고 생각했던 시간들. 그냥 그렇게 그곳에 있었을 뿐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일 경험들. 최선이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봇물 터지듯 했던 아픔의 응어리들.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아이들은 지난 월요일, 남편은 어제 미국 집으로 돌아 갔다. 바닷가의 작은 아파트에 혼자 남았다. 엊저녁엔 칠흑 같은 어둠을 바라보고 서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때도 지금도 혼자인 곳. 아직 한달 반을 여기서 더 지내려고 한다. 한국 국적 회복에 필요한 기간이 거의 다 왔다. 국적회복의 이유였던 엄마를 가까운 곳에서 한번이라도 더 보고 싶다는 이유는 사라졌다. 엄마는 거실의 한 곳에서 영정사진이 되어 날 바라보실 뿐이다.
‘아직 한 5년은 더 왔다 갔다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나의 입 초사에 반기를 들며,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가셨다. 정확히 2월 25일, 외사촌 언니와 함께 엄마 면회를 다녀온 다음 날, 요양원 원장님의 전화를 받았다. 응급실로 모시고 간다는. 왼쪽 대퇴부의 골절이 생긴 것 같다는. 당황스러웠지만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사고라고 생각했다. 나는 여러 상황을 판단해서 수술을 거부한채, ‘NO 라고 말 할 수 있는 용기’로 마음을 다 잡으며 다시 요양원으로 모시고 왔다. 그 다음주, 엄마는 위독한 상태가 되셨고 남편은 급하게 한국에 왔었지만 엄마는 며칠 후 안정되어 남편은 3주 후 미국으로 다시 돌아갔다.
이후, 난 마음의 준비를 했다. 언제 어떻게 이런 응급 전화가 걸려 올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이게 최선이라는 자기 최면을 단단히 걸고…매일 마음을 다잡고…괜찮다고 하며 마음속으로 되이고 또 뇌이며.
그리고 아이들이 할머니의 마지막 시간에 인사를 드리러 왔다. 엄마의 기억 속에 아직도 아기였을 외손자가 이렇게 장성해 와이프를 데리고 올 수 있는 상황이 감사했다. 아이들이 할머니를 큰소리로 부르고 사랑한다는 말을 전해도, 답도 하지 못하는 엄마. 그래도 우리는 옆에서 끊임없이 말하고, 그 작은 손을 잡아 드리고 얼굴을 만지고 옷 매무새를 고쳐드리고 돌아서 나오며 몇 번이나 이 언덕을 더 오를 수 있을까 싶었던 몇 주.
4월의 마지막 주. 요양원 원장님의 전화를 받았다. 갈아 입을 옷을 챙겨 요양원으로 올라갔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의 심각성을 알렸고, 비행기 표만 준비되면 바로 온다고 했다.
그리고 4월 28일. 급격히 나빠져 가는 상황을 만났다. 허둥대지 않으려고 아무리 애써도 말도 안되고, 몸도 마음대로 안되는 당황스러움. 운전을 하는데 눈물 콧물로 시야 확보가 되지 않았다. 심호흡도 잘 되지 않았다. 어쩌다 깊은 숨을 몰아 쉬면 명치 끝이 아팠다. 걸음은 후들거렸고 손도 떨렸다. 옆에서 친구가 잡아 주지 않았더라면 어떡할 뻔했을까? 엄마 옆에서는 의연한 척하며, 편안해 지시라고, 일생동안 딸 하나만 바라보고 사시느라 고생하셨다고, 아버지를 만나면 왜 그리 일찍 가셨냐고 물어보라며, 애들이 와 있어서 다행이라고, 사위도 곧 온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듯 말 하기도 하고 큰 소리로 말 하기도 했다. 감정의 기복에 따라 같이 요동치는 내 목소리의 톤과 울음을 참느라 헉헉 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엄마의 숨소리는 더욱 힘들어 갔다. 그러다 또 어떤 시간엔 좀 편해 보이기도 했다.
그날 오후, 집에 가서 좀 쉬었다가 오라는 간호과장님의 말을 듣고 언덕을 내려왔다. 그리고 다시 안정되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집에 있었지만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다음날 아침, 커피 한잔을 마시고 다시 요양원으로 갔다. 친구도 그곳으로 와 침대를 같이 지켰다. 종일 엄마는 편안해 보였다. 다행이었다. 다시 저녁때가 되었고, 집으로 내려와 잠시 쉬고 있었던 한 밤중. 전화가 울렸다. ‘빨리 오세요’…시동을 걸며 손은 다시 떨렸다.
도착한 요양원. 4월 30일 밤 3시 6분. 한 여인의 일생이 그렇게 떠나갔다. 마지막 숨은 힘들고 거칠었다. 마지막 숨 소리가 그렇게 힘들었던 이유는 두고 가는 딸에 대한 걱정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래도 그 작은 손과 빰은 따뜻했다. 힘든 시간이 지나고 편안해지는 모습에 내 마음도 조금 편해졌다. 장의사가 오고, 시내의 종합 병원 응급실에 따로 마련된 곳에서 엄마의 마지막을 점검해 주는 의사의 서명이 든 종이 몇 장을 챙겨 들었다. 이렇게 몇 장의 종이로 남겨진 엄마의 시간을 가방에 넣고 집으로 돌아왔다.
새벽 공기는 서늘했고 발걸음은 무거웠다. 가슴은 서걱거렸고 구멍이 뻥 뚫린 느낌. 텅 빈 거리에서 엑셀을 밟으며 이렇게 왔다가 가는 것이 인생인가 싶었다.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도 한참 그렇게 앉아 있었다. ‘이게 정말인 거지?’ 라는 의문이 머리 속을 맴돌았다. 얼마를 앉아 있었을까, 한기를 느꼈다. 시동을 끄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와, 친구에게 카톡을 했다. ‘돌아가셨음’ 딱 한마디. 그리고 몇몇 알려야 할 곳에도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바닥 장판에 온도를 올리고 누웠지만 가슴은 더 시리고, 메시지를 보내는 손은 더 떨렸다. 그렇게 새벽은 왔고 먼 바다에서는 수평선 위로 동이 텄다. 누워서 바라보는 하늘은 분홍색으로 물들고 아침을 찾아 떠나는 배들은 긴 물길 내며 떠났다. 윤슬이 반짝거렸고 나는 홀로 바다를 바라보며 엄마의 빈 자리를 찾아 가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