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전, 긴 통화 중이었다. 전화를 끊고 보니 엄마가 계시는 요양원 원장님이 카톡 전화를 하다가 안돼 셀 폰으로, 또 안 돼서 결국은 메시지를 남겨 놓으셨다.
가슴이 ‘쿵’ 떨어졌다. 무슨 일이 있구나.
바로 통화가 됐고, 엄마가 골절이 되신 것 같다고 한다. 응급실로 모시고 간다며, 그리 알고 있으란다. 어느 병원이냐고 그곳에서 만나자고 묻고, 난 허둥대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어쩌지? 얼마나 아프실까? 최악의 상태 단어들만 머릿속에 가득하고 가슴은 콩닥거렸다. 운전을 하며 손은 떨렸고 다리도 후들거렸다. 늘 이야기하는, 평정의 마음도, 준비됐다고 생각했던 것도 어디로 사라져 버리고 머릿속은 온통 뒤죽박죽. 아무튼 병원에 도착해 응급실로 들어섰다. 요양원의 센터장님과 동행해 오신 요양사선생님을 만나고 엄마가 누워 계신 작은 침상 가로 다가갔다. 생각보다 얼굴이 너무나 평온하다.
“엄마. 안 아파? 여기 왼쪽 다리 많이 아프지?”
묵묵부답…
“엄마, 엄마, 엄마. 안 아파?” 목이 메인다.
작은 몸을 덮고 있는 분홍색 담요를 들추고 골절된 쪽의 다리를 만져본다. 발끝이 조금 부은 것 말고는 별 다른 것이 없다. 이미 엑스레이도 찍었고, CT도 찍은 후라 캐스트를 하고 그 위에 붕대를 감아 놓아 그 안의 상태는 알 수가 없었다. 보호자가 왔다는 연락을 받은 응급실 의사가 스테이션으로 부른다.
굳이 설명을 안 해도 엑스레이 상, 좌측 대퇴부 완전 골절.
젊은 의사는 컴퓨터에서 골절 부위를 펜으로 가리키며,
“원장님이 입원하시고 수술하시라는 데요.” 딱 한마디 한다.
다른 검사는 안 하셨나요? 수술을 결정하면 전신마취인가요? 부분 마취인가요? 이 연세에 마취를 하면 깨어나실 수 있나요? 그 정형외과 과장을 좀 만나볼 수 있을까요? 트랙션을 달아서 뼈를 맞추어 끼우고 캐스트를 하는 방법은 안 되나요? 나의 쏟아지는 질문을 말 그대로 무시한 채, ‘제가 좀 바빠서’하며, 전화를 든다. 그리곤 다른 환자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간호사일 꺼라 생각이 드는 남자가 ‘입원 수속은 원무과에 가서 하시고요.’라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는 “수술 안 합니다.” 하고 답했다. ‘뭐지?’ 하는 그의 따가운 시선을 똑바로 쳐다보며, 다시 한번 또렷하게 말했다.
“울 엄마 수술 안 하신다고요.”
“여기에 서명하고 퇴원하십시오.”
종이에는 엄마의 진단명과 수술을 권유했으나 보호자가 거부했다고 쓰여 있었다. 물론 수술을 안 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합병증들도 열거되어 있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 퇴원을 시키는 보호자.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하고 관계란에 <딸>이라고 명기를 했다. 간호사는 식염수 정맥주사를 즉시 제거했다. 응급실에서 엄마 옆을 지키고 계셨던 요양사선생님이 조심스레 엄마 옷을 입혔다. 왼쪽 다리에 힘이 실리지 않게 최대한 조심을 하며 응급실의 차고 딱딱한 침상에서 누울 수 있는 휠체어로 엄마를 옮겼다. 엄마는 무척 가벼웠다.
소변 줄을 낀 채로 담요를 둘 돌 말아 바람을 피하게 하며 밖으로 나왔다. 센터장님이 차를 빼 엄마를 태우고 나는 주차장으로 걸어왔다. 요양원에서 다시 만나자고 하며. 울컥한다. 휴일의 넉넉한 주차장이 더 을씨년스럽다. 아직 매서운 겨울바람은 목으로 불어 들고 가슴은 서늘하다.
운전을 하는 눈앞이 뿌옇다. 흐르는 눈물을 애써 닦지 않는다. 준비되었다고, 언젠가 한 번은 올 시간이라고 말은 늘 그렇게 했으면서도 정작 닥치고 보니,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고 마음도 역시 흔들렸다. 요양원에 도착해 엄마는 방으로 올라가시고, 원장님의 손을 잡고 간곡히 이야기를 했다.
“수술을 했다고 칩시다. 못 깨어나 중환자실이라도 가게 되면 그땐 또 어떡할 거예요? 수술이 되고 마취에서 깨어난다고 하더라도 이런 치매 상태에서, 수술 후 통증 같은 것도 말씀을 못 하실 것이고, 수술 전후 식사도 잘 못하실 것이고, 수술을 해서 골절 상태가 붙을 수 있다면, 그냥 이렇게 캐스트를 한 상태로 두어도 붙을 수도 있고, 지금도 아프실 텐데… 수술을 하고 나면 얼마나 더 아프겠 어요. 수술 부위의 상처도 아플 텐데 표현을 못해서 그렇지… 어차피 못쓰시는 다리예요. 그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벌써 3년이나 다리를 못쓰신 것인데, 우리 애쓰지 말아요. 이만큼 했으면,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요.”
원장님도 울고 나도 울고.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너무 죄송해요.”
만 계속하시는 원장님을 뒤로하고 언덕을 내려왔다.
집에 들어오자 통곡이 밀려온다. 미국에 있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설명하고, 절친과 외사촌에게도 전화를 걸어 현재의 상황을 설명했다. 누구도 수술을 하라고 하지 않았다. 물론 이미 내가 내린 결정이었기에 그렇게 이야기해 주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NO”라고 한 나의 답변이, 엄마가 정신이 또렷하실 때 원했던 ‘편하게 가시는 일’을 도와 드릴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나의 오랜 경험으로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었고, 최선의 방법으로 편안하게 해 드릴 수 있는 길이라고 믿는다.
혼자 있으면 시도 때도 없이 울음보가 터지고, 이게 과연 현명한 판단이었을까 자책을 하기도 하지만, 내가 엄마를 대신해 “NO” 할 수 있는 단단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변명해 본다.
아침 햇살에 동해 바다물결은 눈이 부시다. 어젯밤에 만들어 놓은 소고기 죽을 들고 조금 이따 면회를 갈 것이다.(만들어 간 죽은 결국 한수저도 드시지 못했다. 그래도...)
면회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또 울음이 터지고 가슴이 아파도, 이것이 최선이었다는 생각만 하기로 한다.
오후에는 두꺼운 외투를 입고 털모자를 깊이 쓰고 목도리를 둘둘 감고 속보를 해 봐야 하겠다. 마주 오는 바람에 내 답답한 가슴을 맡기며 걷고 또 걸어야 하겠다. 길이 아득히 먼 곳처럼 뿌옇게 이어진다.
글을 올리는 이시간 남편은 인천공항에서 서울 역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고 한다. 두어시간 후면 강릉 도착이다. 지난 주말 엄마는 더 나쁜 위기 상황을 맞았다. 요양원의 배려로 다시 응급실을 가는 일은 하지 않았다.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고는 하면서, 상황을 마주하고보니 운전을 하기 힘들 정도로 경황이 없다. 지금도 눈 앞은 뿌옇고 명치 끝은 아리다. 그래도 글을 올리는 것은 내 마음을 다시 한번 다잡아 보기 위한 방법이다.
이 글을 읽어주시는 브런치 친구들, 울 엄마의 편안함을 함께 기도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