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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지은 May 23. 2023

혼자라는 그 일

때 늦은 후회에 눈물 흘리며

누구라도 큰일을 겪으면 드는 생각이겠지만, 난 누구보다도 좀 더 힘들었다면 엄살일까… 엄마의 마지막 시간들이 가까워 오자 준비되어 있다던 나의 마음은 수시로 변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최선일까 하는 의구심은 끝없이 이어졌다. 평안 한 척, 힘들지 않은 척. 마음은 들쑥날쑥. 노심초사하였지만, 어디 물어볼 수도 없었다. 늘 혼자였던 나의 자리가 새삼스럽게 느껴졌고 옆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그렇게 아픈 일인 줄 몰랐다. 친구도 있었고 외사촌 동생도 있었고 남편과 통화도 매일 했지만 최종 결정은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오랜 시간 수 없는 죽음을 보았던 중환자실에서 일했고, 누구보다도 더 죽음을 편하게 이야기했지만 막상 엄마의 일이 되고 보니 심연의 진실은 갈등, 그 자체였다.


남편은 시간마다 전화를 걸어와 여러 가지를 챙겼고, 혼자 있는 걸 아는 절친도 수시로 전화를 걸어왔다. 그러나 막상 그 시간이 되자, 난 혼자였고, 누구에게 전화조차 걸지 못한 채 혼자 엄마의 임종을 지켰다. 그 시간을 대비해 수도 없이 이야기를 나누었고, 충분한 예행연습이 되어 있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죽음 앞의 예행연습이란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나의 가면 속에 숨어있던 아픔들. 무남독녀인 나의 지난 일들이 후회와 죄책감으로 태산 같은 큰 쓰나미처럼 밀려오고, 어떤 말로도 용서가 될 수 없는 상황들이 모질면서도 생생하게 어제 일처럼 그려졌다.


아무리 애써도 잊힐 수 없는 질풍노도의 사춘기. 치열하게 살아야 했던 미국 생활. 그리고 그렇게 원하셨는데도 옆에서 살지 못했던 지난 40년. 엄마의 평생에 한 번도 살가운 딸이지 못했고, 한 번도 고분고분하지 않았던 나.  29세에 혼자되시고, 딸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셨는데… 난 그것의 십 분의 일 아니 백분의 일도 못한 채 그렇게 엄마를 보내 드렸다. 미국에 산다는 일은 알맞은 핑곗거리였지만 또한 현실이었다. 전화 한 통화로, 생활비 몇 푼으로 절대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늘 명치끝은 아팠고, 불효의 가슴은 아리고 또 아리었다. 늦게 철이 들며 엄마는 혼자 모든 것을 처리하고 해결했다는 것을 알았다.

난 툭하면 남편에게 ‘당신 아들이 이랬는데, 그리고 당신 아들은 왜 그래? 이 일을 할까 말까? 이 사업을 해야 하나? 공부는 이쯤에서 끝낼까? 이게 잘하는 일일까?’ 등등. 시시콜콜 물었고 그의 대답은 늘 옳았다. 내가 하는 모든 일에 내 편이 되어 도와주고 믿어 주는 사람. 커다란 울타리. 그 든든함을 엄마는 일생동안 한 번도 갖은 적이 없다. 모든 일은 혼자 결정하고 헤쳐 나가야 했다. 누구와 상의하고 누구의 의견을 듣고 평생의 대소사를 결정하셨는지 문득 의문이 든다. 외삼촌도 이모도 미국에 계셨다. 친한 친구분들이 계셨다고 해도 다들 자신들의 가정이 있었던 분들이다. 그 사이에서 홀로 외롭게 모든 것에 책임을 졌던 가장. 그 작은 몸집에 비해 여장부였던 결정과 의지. 뒤돌아보니, 엄마의 홀로서기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다.

변변한 울타리 하나 없이 비바람 몰아 치는 삶의 현장에서 평생 자신의 자리를 지키셨던 분. 엄마는 그 시대의 유일한 여성 교장이었고, 그 이름과 자리에 맞게 늘 당당하고 꼿꼿했다. 그 아우라를 바라보며 난 힘들어했고, 그 그림자가 부담스러워 먼 곳으로 도피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한 번쯤은 엄마의 옆에서 살며, 엄마의 넋두리도 들어주는 살가운 딸은 왜 되지 못했을까?


4년 전, 엄마를 처음 요양원에 모셨을 때, 엄마 친구가 면회를 오셨었다.

“자네 혹시, 한국에 당분간 나오면 안 되겠나? 엄마가 계시면 얼마나 더 계시겠다고… 자네가 나와서 집에서 모시면서 좀 살아보면 좋을 텐데…”
 “제가 아직 일을 하고 있고 남편이랑 아이 다 놔두고 여길 와서 살기 어려워요.”라고 매몰차게 거절을 했다. 엄마의 친구를 모시고 왔던 그분의 딸이 너무 미안한 표정으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엄마, 이 언니는 미국이 집이야. 어떻게 살림을 다 놓고 나와? 아직 일도 하는데…”

엄마의 친구는 못내 아쉬워하며 발걸음을 돌리셨다.

“엄마는 평생 자네 하나 만을 위해 사셨는데, 이제는 자네도 엄마를 위한 시간을 내줄 수도 있으면 좋을 텐데…”

그 한마디는 내 가슴에 대 못이 되어 꽂혔고, 죽을 때까지 빼지 못하고 아파하며 살 것 같다.

그 후 7번째의 한국행이 이어졌지만 엄마는 요양원에서는 한 번도 나올 수 없었다. 코로나라는 복병이 아니었더라도 혼자 모시고 나오는 것은 힘에 부쳤다. 너무나 얄팍한 핑계이지만 이렇게 라도 변명을 안 할 수가 없다.

얼마나 시간이 남았을까, 생각하던 그 시간. 면회를 가면 애써 상냥하게 말하고, 억지로 웃음을 웃고, 모션을 크게 써가며 엄마의 시선을 끌어 보려고 했다. 그에 반해 엄마의 치매는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지난 2달. 엄마는 완전히 말을 잃었다. 그래도 난 혼자 침상가에서 모노드라마를 연출했다. 반응도 없고 눈도 마주치지 못했지만 쉬지 않고 주절거렸다. 따뜻한 말 해 드리고, 손잡아 드리고, 사랑한다는 말을 수도 없이 했다. 평생에 하지 못했던 말을 침상가에 앉아서 열심히 이어갔다. 옛날에 했던 나의 못된 행동을 용서하라는 말부터, 평생 너무 고생하고 애쓰셨다는 감사의 말과 아직도 피부가 이렇게 고아 우쩐디요? 하는 싱거운 말까지. 손을 잡고 비비고 주무르며 했던 말들. 엄마는 기억을 못 하시겠지만 난 하고 싶은 말을 했으니 가슴이 좀 후련했다.

멀리 사는 불효가 가장 컸다며, 용서를 구하며 지냈던 시간들. 작은 일 하나도 남편에게 시시콜콜 이야기를 하며 사는 나의 모습에서 엄마의 그 힘든 외로움을 만났다. 엄동설한의 혹한으로 불어 들었을 그 외로움을 홀로 감내한 내 엄마. 그 차가워진 손을 잡아 내 가슴에 넣고 녹여 드리고 싶다. 너무 늦은 후회인 줄 알지만 이렇게 라도 눈물 흘리지 않는다면 오늘 밤도 잠들 수 없을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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