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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지은 Jun 02. 2023

호상(好喪)이라고 하네요

그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며

엄마가 하늘 나라로 가신지 한달이 지나고 있다.


엄마가 위독했던 3월 초, 남편이 서둘러 나왔다. 남편의 도착 시간을 알기라도 하듯, 그 시간부터 엄마의 상태는 좋아졌다. 자주 면회를 갔고, 남편은 “장모님, 너무 걱정 마세요. 저희들은 잘 지내요. 민석이 에미도 씩씩하게 잘 지낼 거고요. 민석이도 잘 지내요. 손주 며느리도 한국말도 잘하고, 똑 부러지는 성격이 나무랄 데가 없어요.”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시간만 기다릴 수 없어, 2주 후, 언제라도 다시 올 테니, 마음 단단히 먹고 있으라며 돌아갔다. 한번 당황했던 때문인지, 남편이 돌아가고는 조금 무덤덤하려고 애썼다. 언젠가 한 번은 올 일이라는 생각을 매일 밤마다 주문처럼 외우며 잠이 들었다. 그래도 전화기를 완전히 묵음으로 해 놓지 못했고, 집 전화번호는 언제라도 울릴 수 있어서 잠들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 간 남편은, 아이들에게 지금이 아니면 할머니를 뵐 수 없을 거라고… 한번 다녀오는 게 좋지 않겠냐고 넌지시 말을 건네고, 아이들도 좋다고 하였다. 아이들이 도착했던, 4월 중순. 이왕 아이들이 올 계획이니, 한국에서 해 줄 수 있는 것들을 좀 해주고 싶었다. 아이들도 좋다고 했고 나의 발걸음은 분주해졌다. 웨딩 스냅을 잘 찍는 곳을 고르고, 가족들과 만나서 식사할 곳을 정하고, 가족 단톡 방에 올렸다. 참석인원이 파악이 되어야 예약을 할 수 있기에. 며느리에게 맞추어 주고 싶은 한복도 골라 보고, 한국에 온 김에 한약도 좀 해주고 싶었다. 신혼여행을 대신할 그럴듯한 곳에서 며칠 묵게 해 주고도 싶었다. 강릉의 맛있는 것들도 골고루 먹이고 싶었다.


아이들이 있기로 한 기간은 3주 정도. 잡혀진 스케줄 사이사이마다 엄마 면회를 갔다. 엄마는 이미 말을 잃은 지 몇 달 되었고, 외손주 내외의 몇 마디 인사말과 손을 잡아도 거의 반응이 없으셨다. 그래도 아이들은 “사랑해요. 할머니. 또 올 게요, 할머니.” 하는 말로 내게는 커다란 위로가 되었다. 작은 요양원 침상가로 가득히 퍼지던 가족의 사랑. 그 따스함과 꽉 찬 느낌은 내 짧은 글로는 다 표현이 안된다.


아이들은 도착한 다음 날부터, 바쁜 일정들을 잘 소화해 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던가, 잘하고 있다는 내 칭찬에 아이들은 피곤한 기색 없이 잘 따라 주었다. 면회도 여러 번 갔고, 강릉에서의 열흘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리고 아이들은 며칠 국내여행을 떠났다. 말 그대로 휴가였던, 부산행. 아이들이 떠나자 엄마는 상태가 악화됐다. 요양원 침상가를 떠나지 않고 지킨 후 사흘째. 잠시 집에 내려와 눈을 붙일까 했는데, 전화가 왔다. 한밤중의 전화는 우리가 늘 생각하는 그런 상황이었다. 서둘러 도착한 그 시간 엄마는 눈을 감으셨다. 마지막 사흘, 평안한 것 같다가 힘든 숨을 몰아 쉬고, 진땀을 비 오듯 흘리며, 쉽지 않았던 마지막 가시는 길이었다. 남편에게 서둘러 오라는 전화를 걸었다. 아이들에게는 아직 그 시간이 아니었기에, 둘만의 시간에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기다렸다.

그리고 엄마는 떠났다. 아침까지 시간을 기다렸다가, 아이들에게 전화를 하자, 아이들은 그날로 강릉으로 돌아오겠다 했지만, 아직 그럴 필요가 없다고, 이틀 후에 오라고 말해 주었다. 아빠가 오는 시간이 좀 필요하다고. 아이들이 바로 와 준다는 말은 너무 든든했다.

아이들이 왔고, 남편이 도착했고 장례 예식을 시작하며 카톡을 여러 개 받았다.

그중 하나, “자매님, 장례 미사가 언제입니까?”

“4일 1시 반 이에요. 입관은 1시부터 한다고 해서요. 입관 후 바로 이어서 하려고요.”

“제가 그 시간에 맞추어 가겠습니다.”

미국 우리가 다니고 있는 본당의 주임 신부님의 메시지였다. 신부님은 마침 한국에 나와 있었다. 마산교구 소속인 본당 신부님의 본가는 진주였다. 가깝지 않은 거리였지만, 신부님의 마음이 너무 고마워서 “감사합니다.”라고 답을 보냈다.

또 마침 미국에서 친한 부부 2팀이 한국에 나와 있었는데, 그분들도 그 시간에 맞추어 와 주었다. 엄마가 다니시던 강릉 옥천동 상당의 신부님과 우리가 다니던 본당의 신부님 2분이 함께 집전해 주셨던 장례미사.


누구는 “엄마가 복이 많으시네. 신부님이 2분이나 오시고.”

또 누구는 “엄마가 어떻게 이렇게 알고 시간을 잘 잡으셨을까? 좀 정신이 있으셨을 때, 사위 만났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외손자에 손자며느리까지 보시고 가셨네…”

그리고 “이렇게 딸이 느긋하게 와 있는 동안, 이 좋은 꽃피는 봄에… 백수는 못하셨지만 충분히 편하게 사셨고, 평생 누구에게나 당당했던, 작지만 강한 여인으로 사셨으니… 

호상이야 호상. 그야말로 호상이지. 복 받은 양반이야…”라고.


내게 너무나 위안이 되었던 말이 기억된다. “세상에 호상은 없어. 그냥 그런 죽음이 있을 뿐이야. 그러나 누구나 한 번은 겪어야 하는 일이지, 자식 된 도리를 다했다는 생각이 들면 그것으로 된 것 아니겠어?” 했던 말. 아무리 효도를 다했다고 해도 돌아가시고 나면 후회가 더 큰 게 자식이라는 자리 아닐까?  그냥 가슴이 아리고, 그냥 눈물이 나고, 그냥 힘든 이 시간.


그래도 엄마는 우리 넷이 모여 있는 시간을 어찌 아시고 그 시간에 눈을 감으셨을까? 각본을 짜도 이렇게 시간을 잘 맞출 수 있을까 싶다. 평생 딸 하나 만을 위해 사셨던 엄마는 가시는 마지막 길 앞에서도, 딸이 가장 편안할 시간을 고르셨다. 아이들이 곁에 있어서 든든하다는 것을 아셨고, 남편이 올 수 있는 시간을 아셨고, 신부님 2분이 오실 수 있음을 아셨다.


먼 길 마다하지 않고 달려와 손을 잡아 준 친구들과 한국의 장례문화를 전혀 몰랐던 아이들에게 이렇게 가족이 돼 가는 것을 알려주신 엄마. 그 큰 뜻을 어찌 다 헤아릴까. 길을 가다가 붉은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낮은 담장을 만났다. 장미꽃 향기 속에서 내 가슴으로 파고드는 아린 마음.  꽃잎이 붉은 눈물을 떨굴 즈음이면 이 아린 마음도 조금은 바람에 날아갔으면 하고 조심스러운 염원을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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