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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지은 Aug 21. 2023

바람을 가르며

일흔을 바라보며 꾸는 꿈


미국 집으로 돌아온 3주 후는 내 생일이었다. 여독도 풀리지 않았고, 며칠이나 아팠던 후라 미역국 끓이는 것조차 귀찮았다. ‘그냥 지나가자’라고 했지만 남편은 아들 내외를 부르고 스테이크를 준비했다. 하는 수 없이 내가 날 위한 반찬 몇 가지를 준비하고 미역국을 끓였다. 분홍장미 한 다발을 들고 온 며느리와 빈손으로 온 아들을 보며 웃었다. 와인 한잔을 곁들인 식사가 끝나고, 아들이 한마디 한다. 낼 오전에 <REI>로 와, 살게 있어.’  뭔데? 하고 묻자. ‘생일 선물, 엄마 바이크’란다.


집에 돌아와 보니 저녁 시간이 되면 남편은 자전거를 타고 가게로 갔다. 9개월 전만 해도 저녁 식사 후 같이 걷던 길이었다. 늘 걸어서 같이 다녔던 길을 혼자 자전거를 타고 가기 시작했고, 시원하고 운동도 제법 되는 것 같아 좋단다. 걸어 다녔던 길을 자전거로 대치했단다. ‘그래? 그럼 나도 자전거…’라고 한마디 거들었었는데.


나의 자전거 타기는 고등학교 때 시작되었다. 교련 시간인지, 체육 시간인지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자전거를 못 타면 점수가 나오지 않았다. 급하게 자전거를 배웠다. 어느 주말 엄마가 주선해주셨던 먼 친척 아저씨의 짐 자전거. 엄청 무거웠고, 안장은 내 키에 비해 높았고, 뒷바퀴 위에는 짐을 실을 나무 선반 같은 것이 있었다. 집에서 가까운 강릉국민학교 운동장으로 자전거를 끌고 가는 것조차 버거웠다. 아저씨가 뒤에서 잡아주고, 엄마가 옆에서 봐주고, 그렇게 시작했던 나의 자전거 타기. 다행히 몇 번의 시도 끝에 혼자 탈 수 있었고, 운동장을 여러 바퀴 돌자 자신감이 생겼다. 그 후론 강릉 시내에서 경포 호수까지의  길을 달렸다.


방학이 되면 동네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바람을 갈랐던 청춘. 강릉 남대천 제방뚝 길을, 경포호수의 둘레길을, 경포에서 안목에 이르는 작은 솔밭 샛길에서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폐부까지 들어오는 신선한 공기와 함께 했던 추억들이 새삼 기억되며 가슴이 아리기도 하고 웃음이 나기도 한다.

유학생 가족으로 처음 도착했던 곳은 캘리포니아 데이비스. 그곳은 자전거 천국이었다. 평편한 지역, 캠퍼스 중심의 소도시, 중고 자전거를 사서 자전거를 탔었다. 앞에는 작은 바스켓도 달려 있어 시내 마켓에서 파 한 단, 두부 한모, 바나나 한 덩어리 정도는 얼마든지 넣어서 올 수 있었다. 작은 도시를 벗어나 큰 도시로 이사를 하며 간호사 일을 하게 되고 아이가 초등학교를 들어가게 되자 이동의 기본 수단은 자동차여야 했다.

낼모레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다시 자전거. 혼자 생각해 봐도 슬며시 웃음이 나오고, 지인들은 다치면 큰일이라며 말려도 한번 생각한 것은 해 보고 마는 나의 성격을 어쩌겠는가? 다시 시작을 해 봐야 될지 안될지가 판단이 될 것이니.

다음날  <REI>에서 아들을 만났다. 안장을 내리고 기어를 조절하고 헬멧을 쓰고 넓은 주차장으로 나왔다. 차가 드문 쪽에서 아들이 뒤를 잡아주며 한번 페달을 밟아 보란다. 아~~ 움직이네, 페달을 밟으며 몇 초간 비틀거리더니 이어서 앞으로 갔다. 브레이크를 잡아보고, 몇 바퀴 돌고 나자 아들이 한마디 한다. ‘탈 수 있네. 사~  생일 선물~~’ 하며 웃는다.

집으로 돌아와 헬멧을 쓰고 가장 평편한 동네 길에서 한 바퀴 돌고 나자 자신감이 생겼다. 이후 해 질녘이 되면 거의 매일 동네를 돈다. 어젠 처음으로 가게까지 갔다 왔다. 가는 길은 주로 내리막이어서 15분쯤 걸렸고 돌아오는 길은 20분쯤 걸렸다. 돌아오는 길엔 잠시 내려걸어야 할 만큼 힘이 들기도 했지만 일단 왕복을 했다. 모든 일이 다 그렇지만 처음 한번이 중요한 것 아닌가. 자신감이 생겼다. 자전거를 타고 가게를 가는 일이 잦아질 것 같다. 운동도 하고 기분도 상쾌하고 골목 풍경도 감상할 수 있는 일석 삼조.


그 옛날, 김훈의 <자전거 여행>을 읽으며 동해안 솔밭길을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어쩌면 그 꿈은 나의 일흔 생일에 이루어지지 않을까. 물론 김훈 작가의 자전거 여행은 그의 50 대에 이루어졌던 일이다. 나의 꿈은 욕심일 수도 있다.  알지만, 나이 때문에 꿈을 포기하는 일은 하지 않고 싶다.  천천히 페달을 밟으며 바닷바람을 가르는 재미. 멀리 파도를 바라보며 헬멧 아래로 흐르는 땀을 즐기는 재미. 울퉁불퉁한 길에서 엉덩이를 조금씩 들며 스릴을 느끼는 재미. 굽이를 돌 때마다 새롭게 나타나는 풍경들을 만나는 재미. 저녁이 되면 바람을 타고 오는 이웃들의 저녁 음식 냄새도 또 하나의 재미로 보태 진다. 소소한 재미 속에서 만나는 행복을 향해 페달을 밟는다. 아직 변속기어를 다룰 줄도 모르고, 따릉이가 달려 있지도 않아 기척을 낼 수도 없다. 수신호를 할 수 있을 만큼의 실력도 아니고 조심스럽기만 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재미를 뒤로 미룬 순 없다.


로키산맥 끝자락으로 넘어가는 석양을 바라보며 오늘도 힘차게 페달을 밟는다. 석양의 잔상이 남은 붉은 하늘을 내 눈에 담는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은 따뜻하고 포근하다.  페달을 멈추고 한 컷. 내일은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올 하늘. 나의 꿈은 뭉게구름이 되고, 붉은 석양이 되어 내 삶 안에서 천천히 익어간다.

  


**REI=Recreational Equipment, Inc. 미국의 다양한 야외할동과 운동에 필요한 용품, 의류, 신발등을 파는 소매점. 1938년에 설립되어 오랜 역사를 자랑하며 소비자 협동 조합으로 운영된다. 야외활동 학교도 운영하고 자전거 도로를 탐험하는 여행을 함께 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야외 활동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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