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서툴렀던 사람

기다림이 만든 온도

by 서늦은

수현은 약속 시각보다 삼십 분쯤 먼저 도착해 있었다. 일부러였다. 불안하게 늦는 것보다, 어색하게 기다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작고 조용한 이자카야, 아직 이른 시각이라 손님은 없었다. 테이블 한편에 자리를 잡고, 수현은 허리를 펴고 앉아 있었지만 손끝은 메뉴판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투명한 유리컵에 물을 채우고, 다시 반쯤 마시고, 한 손으론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화면을 켰다 껐다 반복하면서도, 사실은 다은의 얼굴을 상상하고 있었다. 사진 한 장 본 적 없지만, 말투만으로 그 사람을 그렸다. 아마 목소리는 상냥할 것 같고, 웃음은 따뜻할 것 같았다. 높지 않고, 부드럽고, 상대를 먼저 안심시키는 말투. 수현은 자기 상상에 스스로 웃었다.

어이없을 만큼 긴장되고, 어이없을 만큼 기대됐다. 시간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심장은 제멋대로 속도를 올렸고 손끝은 물 잔의 표면을 따라 미세하게 흔들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낯선 발걸음, 그리고 시선이 머무는 순간. 사진 한 장 본 적 없는데도, 수현은 알았다. 아, 저 사람이구나. 말투 속에서만 그려왔던 이미지가 현실의 온도를 입고 다가오고 있었다. 다은은 여유 있는 걸음으로 다가와 의자에 앉았다.

“일찍 왔네.”

목소리는 유리잔 가장자리에 방울진 물방울이 터질 때 나는, 짧고 투명한 소리 같았다. 귀를 스치는 순간, 기분 좋은 잔향이 남는 소리. 말투에는 온기가 배어 있었고, 그 온기가 낯설게 가슴을 건드렸다. 수현은 고개를 들 용기가 없어, 허공 어딘가를 바라보며 웃는 척했다. 심장이 여전히 제멋대로 뛰고 있었다. 다은이 자리에 앉자, 테이블 위 조명이 다은의 눈동자를 부드럽게 감쌌다. 그 눈은 깊고 단정해서, 괜히 오래 마주 보면 속내가다 들킬 것만 같았다. 수현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길 막히진 않았어?”

말이 끝나자마자,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는 걸 스스로도 느꼈다. 하지만 다은은 아무렇지 않게, 아주 편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네.”

수현은 괜히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옷걸이를 가리켰다.

“여기… 걸어도 돼.”

다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마워. 근데, 너 진짜 일찍 왔네.”

“응… 그냥, 일찍 오는 게 마음 편하더라고.”

말을 놓기로 한 사이였지만, 여전히 반쯤 존댓말처럼 들렸다. 수현은 너무 긴장한 탓에 목소리도 작았고, 말끝도 흐릿했다.

“혹시 긴장됐어?”

다은이 웃으며 물었다.

수현은 대답 대신, 웃으며 물컵만 들었다.

“… 티 나?”

“아주 많이.”

말끝에 살짝 장난기가 섞였지만, 다은의 눈빛은 부드러웠다.

수현은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너는 안 긴장했어?”

“했지. 근데 뭐, 일찍 온 쪽이 조금 유리한 거 알아? 상대를 기다리는 동안 먼저 자리를 익혀놓잖아.”

다은은 테이블을 두드리며 말했다.

“지금은 내가 늦게 온 사람이지만, 나중엔 모르지.”

그 말에 수현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은 그날 처음 보인, 조금 덜 긴장한 표정이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사케 한 병이 테이블에 올랐다. 잔을 따르며 수현이 말했다.

“실은… 네 말투만 보고, 상상했었거든.”

“어떻게 상상했는데?”

“목소리는 좀 더 높은 줄 알았어. 근데 지금은… 되게 낮고, 조용하네.”

“실망이야?”

“아니. 더 좋아.”

그 말은 무심하게 던져졌지만, 다은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돌려 수현을 봤다. 수현은 그 시선을 피하며 사케를 한 모금 마셨다.

“음… 따뜻하네.”

그 말은 술 얘기였지만, 마치 방금 내비친 속마음을 얼른 덮으려는 말처럼 들렸다.

“나는, 네가 웃을 때 눈을 잘 못 마주치더라.”

“… 그래?”

“응. 아까부터 계속. 조금 귀여웠어.”

“그런 건… 미리 얘기 좀 하지 마.”

“왜?”

“이제 더 못 웃게 되잖아.”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웃었다. 그 웃음이 사라진 자리에 잠깐의 정적이 다시 내려앉았지만, 이번엔 어색하지 않았다. 이야기는 음식 얘기, 회사 얘기, 가장 좋아하는 계절에 대한 이야기로 흘렀다. 시간이 지나면서 수현의 어깨가 조금씩 풀렸고, 다은은 그걸 눈치채면서도 굳이 말하지 않았다. 밖은 어느새 어두워졌고, 이자카야 안의 조명은 따뜻하게 사람들을 감쌌다. 그 따뜻함 속에서, 수현은 문득 깨달았다. 이 사람과 있으면, 침묵도 덜 어색하겠구나. 그건 수현에게 드문 감각이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수현은 휴대폰을 들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잘 들어갔어?”

그 짧은 다정은 수현이 내밀 수 있는 최선이었다. 잠시 후, 답장이 도착했다.

“응. 오늘, 좋았어. 다음에 또 보자.”

화면 속 그 짧은 문장을 읽으며 수현은 이상하리만치 오래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미세하게 웃었다. 그 밤이, 두 사람 사이 가장 단순했던 시간이 될 줄은 아직 아무도 몰랐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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