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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서 Jan 29. 2024

절망 없는 생존 이유를 물었다

절망 없는 생존 이유에 대해 고심하는 시간을 보냈다. ‘절망 없는’의 의미는, 생의 이유를 물었지만 채 꺾이진 않겠다는 마지막 자존심같은 것이었다. 죽고싶다는 건 아닌데 왜 사는지를 알 수 없어서 이불에 파묻혀 세상 소리만 들었다. 그럴수록 더더욱 알 수 없어졌다. 미궁으로 향하는 존재의 이유는 계속 마음을 꺾었다.


생을 향한 의지가 부실해질 때면 생각의 원천을 밖으로 흩뿌린다. 이를테면 쓰는 것조차 대단한 마음을 먹어야 할 때. 두려울 만큼 내 존재가 미약해질 때. 내가 나에게 너무 가까이 붙거나 남을 향한 생각으로 포화될 때. 그럴 땐 나가서 바람도 쐬어보고, 생각을 영상으로 확장할 수 있는 곳을 찾기도 한다. 내 근간이 되는 것에서 벗어난 행위를 통해 내 행위를 되찾는다. 요즘은 시간이 날 때마다 작은 독립영화관 상영시간표를 확인하는데, 좋아하지만 내가 할 순 없는 것에게서 묘한 위안을 얻는다. 불가능한 세계로부터 영감을 받아 가능한 세계에서 풀어내는 방법이 내가 나름 고안한 생의 의미를 되찾는 방법이랄 수 있다.


다만 이러한 행위도 밑으로 꺼지는 과정 없인 무의미하다. 내가 한 칸 더 아름다워지는 순간은 늘 가장 힘겨울 때에 있었고, 이젠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때에 있다. 그러니까, 생의 의미는 그걸 찾는 사람에게만 찾아오며, 생을 의심하는 순간 없이 생을 소중하다 여길 순 없는 것이다.

내가 맞이하는 이런 순간에 늘 초라함을 느끼지만서도, 이것 없는 인생은 더할나위 없이 무의미하다는 것 또한 목전에 알고있다. 피하고 싶어도 그 앞에 가까이 서야 하는 이유는 납작 꺼져 찌그려져야만 아는 나의 무지와 연약함 때문임도.


오늘은 눈 때문에 빨리 도망치라는 회사의 지령을 받았고, 클래식이 빵빵 터지는 카페에서 핀란드 영화를 기다리고 있다. 휴대폰 충전기는 부러 챙기지 않았으며, 덕분에 이런 충만에 가까운 시간을 맞는다. ‘스마트’ 앞에서 얼마나 내 주권을 잃는지. 가히 초라하다.


2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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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고있다는 건

아직 쓸 힘이 손 끝에 남아있단 뜻이고

살고싶단 강한 마음이 난간 끝에 매달려있단 뜻이다.

정말 죽고싶단 생각을 하고 나서부터는 쓰는 상태가 얼마나 다행스러운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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