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만 보고 시작한 드라마.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逃げるは恥だが役に立つ
).’
스토리는 뻔하다. 비즈니스로 만나 계약 결혼을 하게 된 주부와 회사인의 일과 사랑 이야기인데, 여느 일본 드라마처럼 극적인 상황을 1,2화 안에 몰아넣고 후엔 아주 천천히 감정변화를 보여주는 식이다. 그런 점에서 일드는 늘 편안한 마음으로 짤막짤막 챙겨보게 하는 매력이 있다.
그런데 이런 뻔한 게 위로가 될 때가 있다. 2주 남짓의 긴 텀을 가지면서 종일 제목을 떠올렸다. 부끄러워도, 도움이 되는 도망에 관해. 낙오자가 되는 일은 부끄럽다. ‘건강상의 이유’ 안에도 나름의 부끄러움은 잔재한다. 그러나 보면 부끄러움도 떠오르고, 나를 비롯한 타인도 전부 핑거스냅 하고픈 순간까지 찾아온다. 하지만 그러다 보면 결국 망가져 있는 건 나뿐이다.
처음 상해에 갔을 때, 쓰레기장 같은 집에서 살았다. 칼날 같은 한기가 서린 상해에서 난방은 고장 났고 벽에 난 큰 구멍 사이로 찬바람이 숭숭 들어왔다. 샤워기에서는 종일 녹물이 나왔고, 변기는 누가 송곳으로 긁어놓은 것처럼 커버가 엉망이었다. 부엌은 오래된 기름 찌든 때로 만지면 쩍쩍 갈라지는 소리가 났고, 벽에는 전에 살았던 누군가의 여드름 패치가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거미줄 쳐진 창문은 또 얼마나 방음이 안되던지, 새벽마다 소리를 지르며 돌아다니는 아저씨와 어슴푸레 새벽에 오는 쓰레기차 소리에 밤새 잠을 깼다. 심지어 현관문도 제대로 잠기지 않아서, 그런 소리가 들릴 때마다 일어날 수 있는 갖가지 범죄를 상상하며 떨었다. 집은 보호막이 되어주지 못했다. 외국은 나의 보호지가 아니었다. 나는 마지막까지 버티기를 바라던 엄마아빠에게 손을 싹싹 빌어가며 며칠 만에 한국으로 도망쳐왔다.
도망 오면서 늘 드라마 제목과 비슷한 생각을 했다. 도망쳤지만, 후회는 없다고. 그리고 그게 유일한 방법이었다는 걸 늘 상기했지만, 그럼에도 도망이란 단어는 어쩐지 부정적인 언어로만 사용됐다. 도망 – 실패 – 열등 – 비(非) 희망, 등이 같은 궤를 하고 있었다. 지난봄과 여름은 도망쳐 온 것에 대해 늘 생각하곤 했다. 내가 할 수 없었던 것, 피했던 것, 그럼에도 누군가는 꾸역꾸역이라도 해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은 고통스러웠다.
‘비참한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면…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인생은 이런 것이라며, 마음속의 또 다른 내가 애써 괜찮은 척한다.’
사실 도망자의 가장 비참한 대상은 자신이고, 이런 삶도 있다고 말해주는 것조차 자신이다. 타협해야 하는 부분과 나 사이의 치열한 싸움. 이 지점은 수백, 수천 번의 자기 위안을 통해 겨우 돌아오다 다시 멀어진다. 드라마를 보면서 내내 묘한 마음이 들었다. 그건 아마 고마움이었을 것이다. 해결점 없이도 문자만으로 줄 수 있는 위로가 있고, 내겐 내용뿐만 아니라 제목을 상기시키는 것부터 위로가 된다. 검색창에 ‘도망’만 쳐도 드라마 제목이 제일 상단에 뜨는 걸 볼 때면 나처럼 부끄러운 도망을 친 자가 또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동질감도 든다.
‘도망치는 날이 오더라도…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다른 길을 찾아서 다시 돌아올 것이다.’
도망은 그저 다른 방향으로의 시작일 뿐이다. 도피라고 비난해도 상관없다.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도망치는 것이었다면 그건 불가피한 운명 같은 거였다고 생각해도 된다. 한번 도망쳐보니, 두 번 세 번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몸이 보내오는 최후의 신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이다.
어려서부터 새를 좋아한 이유가 있었다. 도망치고 또 도망치고. 그건 자유롭고 또 자유롭다는 말의 다른 언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