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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틈새 Apr 18. 2024

1. 슬픔이 쉴 수 없는 곳

  방과 후 휴대전화에 학생 이름이 떠오르면 불안해진다. 우리 대화는 언제나 안 좋은 주제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기분이 태도가 되어' 교무실로 불려 온 아이와 선생님의 날 선 대화, 교우 관계에서 피어나는 억울한 감정, 교실에서 소지품을 잃어버렸는데 누가 가져간 것 같다는 비합리적 의심 등 온갖 머리를 아프게 하는 말뿐이다. 행복한 대화의 기억은 없다. 즐거운 이야기를 하며, 마주 보고 웃는 일이 우리에겐 아직 어색하다.


“응, 무슨 일이니?”          

“선생님 어제 아빠가 돌아가셔서 내일 학교에 못 갈 거 같아요, 반 아이들에게 제가 결석한 이유가 장례식 때문이라고 말하지 말아 주세요.”          

“그래, 아파서 못 온 걸로 할게.”     


  현실을 받아들이기도 부족한 시간이지만, 그는 덮친 아픔과 외로움을 숨기는 데 그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다. 학년 첫 만남에서 아이들에게 하는 질문이 있다. '중학교 생활을 어떻게 하고 싶어?'하고 물어보면 대다수가 평범하게 지내고 싶다고 한다. 주목받는 걸 싫어해서 '평범'을 노력하는 아이들이 모인 이곳에서 나는 죽음을 장례 확인서라는 문서로 확인하며, 아이는 며칠 뒤 돌아와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숨겨야 하는 절박함과 혼자 견뎌야 하는 슬픔 사이에서 그의 마음은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다.


  한병철은 『고통 없는 사회』(김영사, 2021)에서 ‘회복력이라는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는 트라우마의 경험을 성과향상을 위한 촉매로 만든다.’라고 썼다. ‘한 세계의 소멸’이 아닌 ‘부모상’이라는 일반화된 슬픔은 극복의 대상으로 내몰리고, 회복이라는 말은 극기를 통한 자기 성장이라고 우리를 회유한다. 고통이나 슬픔은 비효율적이어서 경쟁에 뒤처지게 만드는 요인으로 전락해 버린 사회에는 ‘10년이나 지났으니, 인제 그만 울고 현실을 살아야 한다.’라는 무가치함을 넘어 해롭기까지 한 말들이 넘실거린다. 그날 이후 날마다 치열하게 살고 있는 유가족을 위한 트라우마 치유센터가 개소하였지만 슬픔의 표현을 가로막고,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회는 여전히 승자 같다. 부모의 죽음에 대한 공적인 애도 기간은 5일이다. 물론 장례 확인서를 제출했을 때의 말이다. 몸보다 좁은 의자에 자신을 구겨 넣어야 하는 이곳도 사회와 마찬가지로 슬픔이 쉴 수 없는 곳이 돼버린 것 같다.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삼일장을 치르는 중에도 시험 준비에 조바심이 났었다. 장례식 첫날, 평일인데도 교실 옆자리에 앉는 친구가 조문을 왔다. 조문이 끝나자 나를 방으로 끌고 와 까만 비닐봉지를 열더니 떡볶이를 꺼내 입에 넣어 주었다. 익숙한 달달함과 매운맛이 마음을 조금 데워 주는 것 같았다. 담임선생님은 가정 형편을 아시고 장학금을 받도록 도와주셨다. 친구는 수능시험 경쟁 상대였고, 담임선생님은 무관심해 보였었다. 하지만 그들은 나의 슬픔을 어떤 식으로든 보듬어 주었다. 그 이후로도 친구는 여전히 강력한 경쟁 상대였고, 담임선생님은 날이 갈수록 더욱 무관심해 보였지만, 지금 이 아이처럼 나는 슬픔을 일부러 숨기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었다.    


  어린 시절 단 걸 좋아하지도 않던 나는 충치가 심해 항상 치통에 시달려야 했다. 치과의 알코올 냄새와 '지잉'하며 영혼조차 닳아 없어질 것 같은 기계음이 무서워 안 간다고 떼를 쓸 때면, 어머니는 내 등을 두드리며 한동안 모로 누워 안아주었는데, 그러면 고통이 멀어지고, 잠이 왔다. 슬픔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끌어안아야 할 존재다. 아픔이나 외로움이 개인의 일로만 이해되고, 고통을 치료의 영역으로 외주화 시켜 버린 사회에서 슬픔이란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의 마음 같다. 최근 통화목록에서 아이의 이름을 가볍게 눌렀다. 곧 아이와 닿게 된다. 상담은 1시간이라도 하겠지만, 지금은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조바심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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