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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틈새 Apr 18. 2024

2. 슬픔을 증명하는 일

그녀의 수첩에는 날짜와 시간, 통화 내용이 빼꼭했다.

낮과 밤, 휴일을 가리지 않고 어지럽게 적힌 숫자만으로도 화가 나는 일이 참 신기하다. 숫자만큼 가장 많이 적힌 문장은 ‘선생님이 책임지실 건가요’였다. 책임이 법리적 잣대와 보상이라는 논리로 읽히는 시대에 던져진 존재들이 '책임지라'라고 내뱉어진 말에 할 수 있는 일은 당황하며 자신의 슬픔을 증명하는 일밖에 없다.

     

자신은 무고하다며, 자신의 아픔과 슬픔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한다. 의지하거나 믿었던 사람이 자신의 무고함을 이해해 주는 다정한  동료가 아니라 심판자의 역할을 자처하며 다가올 때, 혹은 그런 시선을 느낄 때 자기 존재는 아득해진다.


책임의 무게에 짓눌리는 것이 아니라 책임지는 일이 더 이상 가치 없는 일이 돼버리기 때문이다. 그녀가 했던 일은 언제나 실패하더라도 믿어주는 일뿐이었다.    

  

믿는 마음이 부서질 때, 우리가 곁에서 해야 할 일은 그 마음이 모래보다 가벼운지, 바위보다 무거운지 재보는 것이 아니라, 부서진 마음을 감싸 주는 일 일지도 모른다. 무고를 한바탕 증명하며, 회의실을 나서는 그녀는 밝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선생님이 옆에 계셔서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어서 후련해요.”    

 

‘공감은 함께 울어주는 일이 아니라, 그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주는 것’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듣는 이유는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항상 듣는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증명해야 하는 사람보다 힘이 세다. 그들의 마음은 단단해서 부서진 마음을 위해 좀체 열리지 않았다.


반 아이가 지각을 했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또 지각이구나'라는 생각이 들며 화가 났다. 평소라면 지각의 이유를 묻지 않은 채 남아서 청소하고 가라고 했겠지만, 그날은 왠지 이유를 물어보고 싶었다.


"왜 지각했니?"


"어제 아빠가 술을 드시고 와서 새벽 4시까지 엄마와 싸웠어요. 새벽이 돼서야 잠이 들었는데, 일어나 보니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났어요. 선생님 그런데 부모님이 싸우시고 나서 이혼하신다고 하는데, 저는 어떻게 해요?"


아이에게는 지각해서 혼나는 일쯤은 별일이 아니다. 그에게 별일은 부모님의 이혼 발언이다. 그의 슬픔이 나의 화를 없애버렸다. 반성이나 사과 없이 화가 풀어진 건 그가 늦을 만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의 슬픔이 나의 화를 별일 아닌 일로 만든 까닭이다. 


모든 슬픔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들어주는 일이다. 아이들은 내내 교실에서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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