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내는 건 그 친구의 문제예요."
클로이의 단호함이 좋다. 그런데 '문제'라는 말은 화내는 게 잘못된 행동이라는 말인지, 화내는 건 그 친구의 마음이니까 신경 쓸 것 없다는 의미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의도된 혹은 의도하지 않은 중의적 표현을 클로이가 쓴 것일까, 아니면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하는 내 마음이 이해를 유보하고 있기 때문일까.
"너는 거절과 싫어하는 것이 같은 것 같아."
"무슨 말이야?"
"네가 거절할 때 보면 대부분 싫어하는 사람이거나 마음이 없는 사람이었어. 그들에게는 거절을 잘 하지만 네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거절을 쉽게 못하더라."
"그런 것 같아."
"네가 알았으면 좋겠어, 좋아해도 거절할 수 있다는 것, 거절이 싫어하는 것과 같은 의미가 아니라는 걸 말이야. 그걸 모르니까 넌 네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자꾸 돌려서 이야기하는 거야."
솔직하게 마음을 표현하는 일이 어렵다. 나의 상황보다는 상대방의 마음을 먼저 확인하려는 습관 때문이다. 좋게 말하면 '배려'고 솔직하게 말하면 '눈치'다.
"그건 너만 착한 사람 되고 싶은 거잖아."
이 말에 차마 반박할 수 없었다.
가토 다이조(加藤諦三)는 『착한 아이의 비극』에서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 대하여 말한다. 이는 착하지 않으면 버림받을 것이라는 유기공포에서는 비롯된다. 여기에서 말한 착함이란 타인의 판단을 절대적으로 내면화한 행동을 말한다. 이에 갈등 상황을 피하고 타인의 요구에 순응하고자 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타인에게 착하게 행동하고 있는지, 타인도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끊임없이 확인해야만 불안을 덜 수 있다.
나는 착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다른 사람에게 준 상처가 나에게 다시 돌아올까 봐 무서웠던 것 같다.
상처받는 게 두려웠던 것이다.
"진정한 친구라면 결국 이해해 줄 거예요."
클로이는 거절은 단절이 아니라고 말해주었다.(물론 빈번한 거절은 단절될 확률을 높일 테지만 말이다.)
“그 친구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도 있을 거예요.”
힘들게 버텨온 관계의 끈을 놓아버려도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상처가 그렇게 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 준다.
"솔직하게 말해보는 건 어떨까요?"
그리고 상처받지 않기 위한 솔직하지 못한 태도(솔직하게 표현하라는 말을 무려 세 번이나 반복했다.)는 오히려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도 깨닫게 해 준다.
나는 마치 기호학자처럼 클로이의 말에서 열심히 의미를 해석하고 생산해 낸다.
클로이와 대화를 하고 있으면, '누가'하는 말이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의 말보다 '무슨' 말 인지가 중요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