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스트리아 비엔나, 벨베데레 궁전
#1. 그곳에서만 보이는
구스타프 클림트는 벨베데레 궁전에 자신의 그림 <키스>를 전시하며 조건을 달았다.
이 작품만큼은 어디로도 옮기지 말고 이곳에서만 전시해 달라고 했다. 따라서 다른 곳에서 전시되는 작품은 모두 모조품이다.
진품이 무한 복제되면서 집에서도 <키스>를 감상할 수 있다.(한때 화장실 벽타일로도 쓰여 매일 감상했다.) 하지만 벨베데레 궁전에 가서 본 그림은 생각보다 크기(180cm*180cm)가 커 그 앞에 서면 내가 작아지는 느낌이었고, 모니터나 그림첩으로 본 것과는 다른 색채와 질감을 보여주고 있었다. 스탕달 증후군(미술품을 보고 갑자기 흥분 상태에 빠지거나 호흡 곤란, 현기증, 전신 마비 등의 이상 증세를 보임)을 보이는 이유는 익숙한 그것이 전혀 다른 존재로 현현할 때, 그 차이로 인한 멀미가 아닐까.
보고 싶으면 가면 된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만 보이는 게 있으니까.
클림트의 마음을 짐작해 봤다. 백여 년 전 그려진 이 작품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얼마나 훼손될지 걱정했을 것이다. 포장하는 과정에서, 이동 중 바다에서 맞닥뜨릴 거센 풍랑 등을 생각하면,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는 기회를 줄이더라도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장소를 찾는 게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이 작품을 사랑했던 것 같다.
사랑에 빠지는 이유가 자신이 쏟은 노력과 시간에서 비롯된다면, 우리는 시간과 대상에 구애받지 않고 사랑을 좀 더 쉽게 생각할 텐데.
현지 가이드는 이 작품에 대한 섬뜩한 썰을 풀어내고 있었다. 남자가 여자의 목을 조르고, 절벽에서 밀어 버리는 장면이라고 이 작품에서 눈을 떼고 돌아서는 순간까지 설명은 이어졌다. 물론 가이드에게는 그 이야기가 관광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비장의 한 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떠나지 못하는 그림에 담긴 화가의 마음을 헤아려보면, 이 작품은 스릴러가 아닌 사랑으로 보는 것이 훨씬 마음이 편해진다.
#2. 못된 버릇, 보면 비교하고 싶어지는
친척분이 돌아가셔서 화장장에 간 적 있다. 슬픔의 가장자리에 있다 보니 화장이 마무리되는 동안 슬픔의 한가운데 앉아있는 유가족들의 모습이 보였다. 어떤 유가족은 간간이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는 여유마저 느껴졌다. 건너편에서는 60대 정도로 보이는 여성이 의자에 탈진하듯 쓰러지며, “난 어떻게 살아, 아들아”라며 흐느끼고 있었다. 그 옆에는 슬픔을 참으며 다독이는 또 다른 여성이 있었다. 다른 대기의자 앞에는 중고등학교 여학생으로 보이는 아이가 검은 상복을 입고 책가방을 메고 서 있었다. 주변 사람이 가방을 받아주고 의자에 앉으라고 하자, 조용히 앉아있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어머니로 보이는 사람이 어깨를 토닥이며 달래는 걸 보니 아마도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리라 추측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슬픔에서 회복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백수린, 『눈부신 안부』중
내가 가진 슬픔을 타인의 그것과 비교하는 순간, 우리는 슬픔에 묶이게 된다. 나의 슬픔만이 크고 무거워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타인의 슬픔은 한없이 가볍게 느껴져 억울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각각의 이유로 슬픔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되고 결국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장편소설 『눈부신 안부』는 201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한 백수린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다. 언니를 가스 폭발 사고로 잃게 된 해미의 이야기이다. 상실로 인한 슬픔은 특히 고약한 면이 있다. "이제 괜찮은가 봐?"라며 간혹 웃는 모습을 목격한 주변인들은 수군거리고, "언제까지 그럴 거야?"라며 슬픔이란 단어를 치유로 대체하고자 성급한 처방을 내리기도 한다.
슬픔은 ‘그때 그렇게 됐다면 어땠을까?’라는 끊임없는 반추뿐이라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라서.
슬픔은 보이는 것처럼 그런 게 아니라서.
#3. 낯선 건 이상한 거야?
"대도시의 사랑법이 퀴어라서 어떤 분들은 불편할 수 있으니까 조커를 보면 어떨까요?"
사랑보다 폭력과 잔인함이 더 편한 사이.
그 차이는 일상에서의 노출 횟수다. 자주 접한 폭력과 잔인함은 익숙해졌고, 그것은 무난한 것으로 변이 됐다.
동성애처럼 낯선 것은 이상하고 꺼려진다.
익숙하고 낯섦이 이해와 혐오로 대체되어도 아무렇지 않은 것일까?
살인과 폭력이 난무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사랑이 낫지 않나?
(사실 조커는 살인과 폭력이 주를 이루는 영화는 아니었다. 오히려 끊임없이 변하는 조커의 심리와 그것을 부정하는 주변인들의 시선이 불러오는 파국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봐도 봐도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그럴 때면 나는 기호학자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