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가고 싶지만...
죽고 싶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혼자 남아 이 세상에 사는 것보다는 그냥 따라 죽는 것을 선택하고 싶었습니다. 순사(殉死)라고 하던가요… 아무리 사랑해도,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래서 마지막 순간까지 두 손을 꼭 부여잡아도, 마지막 그 길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결국 손을 놓고 보내 줘야 합니다.
저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 마지막 이별의 순간에는 아마 그냥 따라 죽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을 것입니다.
그만큼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은 슬프고 두렵습니다.
그래서 내가 믿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살려달라고 기도했는데 들어주지 않으셨으니, 대신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 그건 쉽게 들어줄 수 있으시지요?”
그런데 실제로 데리러 왔습니다. 천사가!
어느 날 밤 잠이 들었는데, 소리가 들렸습니다. 맑은 시냇물 소리 같기도 하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같기도 한 느낌의 청아한 목소리였습니다. 모습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음성은 지금도 귓전에 또렷이 울리는 듯 명확합니다. 단박에 천사의 목소리로 느꼈습니다.
그 목소리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금만 참으면 편안해질거야.”
그러면서 차츰 숨이 막혀왔습니다.
“조금만 참으면 편안해질거야”
쉴 새 없이 되풀이되는 이 말이 처음엔 아름답게 들렸지만, 나중에는 숨이 막혀가면서 공포스러운 느낌으로 변해갔습니다.
그러나 잠결에도 생각했습니다.
“아 조금만 더 참으면 죽겠구나…”
그래서 이를 악물고 참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너무 숨이 막혀 참지 못하고 신음소리를 내뱉고 말았습니다. 아니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 비명 소리에 놀라 잠을 깨고 말았죠. 몸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잠이 깬 순간, 너무 슬프고 화가 났습니다.
“아, 조금만 더 참았으면, 가는건데…”
꿈이었는지, 실제로 천사가 데리러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꿈이었겠지요. 천사가 데리러 왔다면, 반드시 데리고 가지 않았겠습니까?
아무튼 그렇게 정말 어렵사리 찾아온 기회를 놓치고 말았고, 그것이 너무나 속이 상했습니다.
다른 곳에서도 언급했지만, 완전히 슬픔에 빠져 제정신이 아닐 때,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배고픔도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2~3일을 굶어도 배고픈 줄 모르고, 반대로 밥이나 뭔가를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은 이상한 현상이 빚어지더군요. 안 먹을 때는 밥을 먹어야 하겠다고 생각만 해도, 그 밥 냄새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 밥 냄새가 코를 찌르는 것처럼 느껴져 구역질이 나서 아무 것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 번은 4일을 굶었는데 별로 고통스럽지 않았습니다.
퍼뜩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더군요.
“아, 이렇게 안 먹고 누워있으면 죽을 수 있겠구나…”
그런데 또한 곡기만 끊어서는 죽는데 너무 오래 걸린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그래, 물도 안 마시면 더 빠르게, 어쩌면 1주일 정도 만에 죽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물도 끊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날부터 인가, 몸에 열이 나면서, 여기저기 쑤시고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열은 점점 높아졌고, 그에 비례해서 통증도 심해졌습니다. 죽는 것은 고사하고, 온 몸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다시피 아파트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서 차를 끌고 병원으로 갔지요.
의사 선생님은 열이 40도를 넘어가면 온 몸이 많이 아플 텐데 왜 아제서야 왔느냐고 하더군요. 그리고 링거를 꽂고 해열제 진통제 등을 주사해 줬습니다.
죽는다는 사람이 그깟 통증에 못 이겨 병원을 찾고, 주사를 맞고 있으니 쓴웃음이 났습니다.
“죽고 싶다는 말은 거짓인가…”
정신과 치료를 받을 때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사람이 자살할 때, 예를 들어 고층건물에서 투신할 때, 보통은 뭔가 매우 심각하게 번민하면서 두려움을 극복하고 비장하게 뛰어내린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제 경험에 비추어보면.
그때 우리집이 12층이었는데요… 베란다에 나가서 밖을 보면 아래 길이 까마득히 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베란다 바닥에 연결된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그러니 비장하게 뛰어내릴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걸어 나가면 되는 겁니다.
앞서 굶어도 배가 안 고프고, 먹어도 배가 안 부르다고 했습니다만, 그런 상태가 되니까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변비도 오더군요. 한 마디로 생명 활동이 엉망이 되는 것이지요. 그때는 하루 한두시간 정도밖에 못 잤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베란다에 나가면 바닥이 연결된 것처럼 보일 때가 종종 있더군요.
그런데 왜 안 뛰어내렸냐구요?
모르겠습니다.
아마 그런 상태가 더 오래 계속되었으면, 뛰어내렸을 수도, 아니 걸어 나갔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약의 효과로 잠도 좀 자고, 기분도 좀 나아지고 해서 괜찮았던 것 같습니다.
당시 의사 선생님은 기분이 조금만 평소와 다르고 이상하다고 느껴지면 바로 119 구급차 불러서 응급실로 오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저는 놀라서 반문했습니다.
“아니, 응급실이라뇨…?”
“저희는(정신과) 그게 응급 상황입니다.”
즉 자살 위험이 있는 환자는 그런 정신 상태가 응급 상황이라는 말입니다.
저는 아내를 잃으면서 죽고 싶었지만, 자살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모순되는 말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냥 내 생명을 거두어가 주십사고 기도한 것이지요.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자살 위험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 번 충동을 느꼈고, 실제 아슬아슬했던 순간도 있었으니까요.
아무튼 결국 죽지 않고, 또는 죽지 못하고, 그럭저럭 이렇게 살아남아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시간이 해결해 준 것일까요?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만, 반드시 그렇다고만 할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 죽고 싶은 마음의 강도가 옅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없어진 것은 아니니까요.
분명한 것은 아내를 잃기 전과 후의 생사관(生死觀)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점입니다. 사별 전에는 삶에의 의지를 바탕으로 희미한 죽음의 그림자를 보고 있었다면, 사별 후에는 죽음을 전제로 삶의 모든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저의 경우는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에 애착이 줄어들고,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염세주의에 빠져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삶의 무게가 가볍다고 해야 하나요?
물론 이것이 관조(觀照), 달관(達觀), 뭐 그런 뜻도 아님은 물론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버린 세상, 그것은 분명, 내겐, 슬프고 외로운 세상입니다.
초기의 격렬한 슬픔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슴 속 깊은 곳으로 숨어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여전히 살아있음은 분명하고, 가끔씩은 불쑥 가림막을 뚫고 나와 눈물을 자아내기도 하니까요.
우울과 외로움과 슬픔이 베이스로 깔려 있는 삶이라고 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