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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Oct 25. 2024

슬픔을 극복해 나가는 단계?
그런 것은 없습니다

질풍노도의 바다에 내동댕이쳐진 작은 조각배일 뿐

슬픔을 극복해 나가는 단계? – 그런 것은 없습니다


‘도대체 지금 나는 어디쯤 와 있는 것일까?’

슬픔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와중에 어느 순간 이런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나는 살아 있고, 그래서 또한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늪이 얼마나 깊고 넓은 지, 그리고 그중에 내가 어디까지 와 있으며, 건너편에 단단한 땅이 있다면 그곳까지 가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또는 그곳에 도달하기나 할 것인지…

그러나 이 늪에는 어떤 이정표도 없습니다. 앞길이 한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신통하게도 거의 반세기 동안이나 잊고 있었던 어떤 잣대가 머릿속에 퍼뜩 떠올랐습니다. 사랑하는 이와 사별한 후 남은 사람이 겪게 되는 감정의 변화 과정을 5단계로 나타낸 것입니다.

그것은 ‘충격 → 부정 → 우울 → 분노 → 수용’ 또는 ‘부정 → 분노 → 타협 → 우울 → 수용’ 등으로 표시됩니다. 즉 처음엔 충격에 빠져 있다가, 곧 현실을 부정하고, 그다음 깊은 우울 단계를 거쳐 분노의 감정을 겪은 후 마침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란 현실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5단계를 알게 된 것은 근 50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였습니다. 그때 저는 12살이었고, 막내둥이로 아버지의 사랑을 너무나 많이 받았던 탓에 견딜 수 없는 충격과 슬픔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당시 의과대학에 다니던 사촌형이 이런 5단계 과정을 거쳐 슬픔은 극복된다고 말했고, 그것이 어린 저에게는 꽤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불변의 진리처럼 받아들였습니다. 실제로 아버지를 잃은 슬픔이 그런 5단계를 거쳐 극복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분명해진 것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해서 이 5가지 감정을 모두 느낄 수도 있고, 일부만 느낄 수도 있으며, 그것도 위에 제시한 순서대로 진행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모든 사람들이 이런 똑같은 감정의 단계를 거쳐갈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맞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감정이란 것이 어떻게 그렇게 단선적이고 일률적으로 움직일 리가 없으니까요.


실제로 아내가 하늘나라로 간 다음 초기엔 당연히 그런 단계를 거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선 극심한 슬픔 속에서 내 감정이 충격인지 부정인지 분노인지 분명치 않았습니다. 그것은 아마 이런 온갖 감정이 뒤섞여 마구 분출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이런 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유난히 슬픔에 깊이 빠졌고, 그래서 일상이 완전히 무너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슬퍼만 하고 있을까, 이 슬픔이 끝나기나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지금은 어디까지 와 있는 것일까…

그때 애도의 5단계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그에 맞춰 나의 상태를 파악해 보니까 어느 단계에 와 있는지 알 수 없고, 실제로 그런 단계를 따라 진행되고 있지도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래서 호스피스병원에 있을 때 상담받았던 선생님을 만났을 때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지금 5단계 중 어디까지 와 있는 것일까요?”

“그렇게 순서대로 진행되는 것도 아니고, 그 5단계를 모두 거치는 것도 아닙니다. 그건 옛날이야기지요.”

“그럼 그 5단계란 틀린 이론인가요?”

“꼭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그대로 진행되는 것은 아닙니다.”


“상실의 순간, 우리가 살던 ‘가지런한 세상’도 사라진다”

사별의 슬픔과 애도를 다룬 어떤 책에서 읽은 한 구절입니다.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라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규칙적인 삶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즉 모든 일이 어떤 법칙에 따라 진행되는 세상이죠. 하루 일과에서부터 인생 전체의 행로가 ‘정해져 있고’, 어떤 규칙과 법칙에 따라 모든 일이 진행됩니다. 예정에 없던 일이 생겨도 마찬가지입니다. 갑자기 멀리 출장을 간다고 해도, 목적지와 교통편이 정해지면 모든 일은 예측 가능한 법칙 내에서 이뤄집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후, 이 슬픔이, 이 애도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고 언제까지 갈 것이며, 지금 현재 나는 어느 단계에 와 있는지 궁금할 수 있습니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현재 지나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 몇 정거장이 남았는지, 몇 시 몇 분에 도착할지 궁금해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애도의 5단계란 법칙이 적용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 이제 내가 3단계를 지나고 있구나, 그러니 앞으로 두 단계만 더 지나면 된다… 이런 판단을 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스스로를 추스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 사랑하는 사람이 숨을 거두는 순간 그런 가지런한 세상은 이미 무너졌습니다. 나의 감정은, 나의 슬픔은 그런 법칙을 따르지 않습니다.

깊은 우울에 빠졌다가, 분노가 치미는가 하면, 갑자기 현실을 부정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감정의 기복이 없겠습니까?

슬픔에 잠긴 ‘나’는 질풍노도에 내던져진 일엽편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작은 조각배가 폭풍 속에서 정해진 노선을 따라 차례대로 경유지를 거쳐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냥 그 엄청난 슬픔의 파도에 그저 요동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5단계는 스위스 출신의 미국 정신과 의사로 호스피스 운동의 창시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가 1969년 ‘죽음과 임종에 관하여(On Death and Dying)이란 저서를 통해 발표한 ‘분노의 5단계’ 이론입니다.

원래 이 5단계는 그 제목이 말해주듯이 임종을 맞는 사람들의 심리상태를 분석한 것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퀴블러로스는 말기 환자 1백여 명을 대상으로 심리 상태를 분석한 결과, 그분들이 부정- 분노-타협-우울-수용의 5단계를 거친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그런데 이 5단계는 애도 과정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실제 애도 과정에서는 이 5단계가 순서대로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모두가 이 다섯 가지 감정을 느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임종을 앞둔 말기 환자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애도자의 심리를 파악하고 상담하는데 유익한 기준을 제시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관련 분야의 획기적 이론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참고로 네이버 지식백과의 ‘애도과정’(mourning process) (상담학 사전, 2016. 01. 15., 김춘경, 이수연, 이윤주, 정종진, 최웅용)에 나오는 이 부분의 설명을 인용해 봅니다.

 

퀴블러로스(Kübler-Ross)는 사별가족의 애도과정을 충격, 분노, 타협(죄책감), 절망(슬픔), 수용의 5단계로 나누고 각 단계에서 가족이 경험하는 가정을 설명하였다. 각 단계를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충격의 단계다. 이 단계에서 사별 가족은 충격에 휩싸여 정신이 멍해지고 망연자실한 모습을 보인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 ‘그 일을 막을 수 없었을까?’ 등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짐으로써 고인이 정말 떠나 버렸음을 믿기 시작한다. 이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치유과정이 시작되고 지금껏 부정해 왔던 모든 감정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둘째, 분노의 단계다. 이는 죽음을 막을 수 없었던 자신과 예기치 못한 부당한 상황에 화가 남을 의미한다. 분노의 대상에는 친구, 의사, 가족, 고인뿐 아니라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 분노 아래에는 소외되고 버림받은 기분이 숨어 있다.

셋째, 타협의 단계다. ‘만일 그랬더라면…….’ 하는 가정 속에서 자신의 잘못을 발견하고 다르게 행동할 수 있었던 부분을 생각해 낸다. 타협은 유가족이 각 단계에 적응할 수 있도록 시간적 여유를 주는 것으로 흐트러져 있는 혼란상태에 질서를 부여한다. 

넷째, 절망의 단계다. 타협의 단계가 지나면 관심은 현실로 이동한다. 이때의 절망은 피함으로써가 아닌 슬픔 곁에 앉아서 충분히 이 감정을 느낌으로써 회복할 수 있다. 

다섯째, 수용의 단계다. 이상 없음이나 괜찮다는 의미보다 고인이 떠나 버린 현실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현실이 영원한 현실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즉, 고인이 떠나 버린 새로운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된다. 

이런 애도의 과정은 순서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각 단계에 머무는 시간이나 마지막 수용단계에 이르는 시간은 개인별로 다르다고 설명하고 있다.

 

슬픔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아무리 슬퍼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충분히 애도해야 합니다.

깊은 슬픔 속에서 내가 어떤 상황에 빠지더라도, 대부분 그것은 ‘정상’이라고 합니다. 치명적인 자해를 한다거나, 다른 사람에게 심각한 위해를 끼치는 일이 아니라면, 나의 슬픔에 침잠하는 것은 절대 ‘비정상’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다면 그것이 오히려 비정상이라는 겁니다. 상담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주장하는 것을 보고 저는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무리하게 슬픔을 억누르고, 억지로 ‘정상’으로 돌아간 것처럼 꾸미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지요. 자연스럽게 슬픔을 표현하고, 마음이 가는 만큼 애도하는 것이 ‘비정상’이 아니라 오히려 바람직하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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