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은 몸이 기억한다’
떠나간 사람과 함께 하는 행복의 다른 모습
“슬픔은 몸이 기억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도 어느 순간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슬픔에 울컥한 경우가 많습니다. 망자와의 특별한 추억이 담긴 장소나 물건, 시간 등이 그런 슬픔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전혀 예기치 못한 시간 장소 상황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상황을 ‘슬픔은 몸이 기억한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가장 최근의 경험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사별 6년을 지나면서 저의 슬픔은 수면 아래 가라앉은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임에서 웃고 떠들면서 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 여러가지 해야 할 일을 차질없이 수행하며, 규칙적인 일상을 보내고 있으니까요.
어느 휴일, 한가한 시간, 카페에 앉아 커피를 즐기면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출출해서 추가로 베이글과 크림치즈를 주문했습니다. 꼭 배가 고파서 라기보다는 왠지 그냥 먹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베이글을 받아 자리에 돌아와서 한 조각 떼 내어 크림치즈를 바르는 순간 울컥하면서 눈물이 솟았습니다. 전혀 뜻밖의 일이었지요.
아니 뜻밖의 상황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내와 나는 휴일 늦은 아침 커피 샵에서 커피와 베이글로 식사를 대신하던 때가 가끔 있었습니다. 그녀는 종종 크림치즈를 아끼고 아꼈다가 마지막 한 조각에 남은 것을 몽땅 퍼서 잔뜩 발라서 장난스럽게 먹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가 크림치즈를 떠내는 순간, 어쩐지 그 모습이 떠오르면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던 것입니다.
이런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예기치 못한 시간 장소 상황에서 추억의 습격을 받는 것이지요. 이런 슬픔을 유발하는 것은 시각적인 것에서부터 냄새, 소리, 사람, 장소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어떤 책에 보니까 이런 일은 우리 뇌의 감정이 집중돼 있는 ‘대뇌변연계’에서 이뤄진다고 합니다. 어떤 모습이나 냄새 같은 것이 그곳에 전달, 등록된 다음 더 발전된 인식 기관에 의해 해석돼 과거의 특정 기억과 연관시켜 눈물 샘을 자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몸이 기억한다고 하는 표현이 옳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베이글에 크림치즈를 바르는 것은 비교적 직접적인 기억에 의해 촉발된 것이어서 쉽게 수긍하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연관성을 몇 단계 건너 뛰어 사람을 울컥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또 이런 경험이 있는데요. 그것은 다람쥐입니다. 도대체 다람쥐 사진을 보고 왜 울컥했을까요?
처음엔 스스로도 의아했습니다. 그러나 금방 왜 그랬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아플 때, 병원에서 일시적으로 퇴원해 여행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갑자기 묵밥이 먹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 검색을 통해 시골집 근처 어느 산골에 묵밥 맛집을 찾아내 식사를 했습니다. 다람쥐는 도토리를 먹고, ‘묵’ 하면 도토리 묵이죠. 다람쥐 사진을 본 순간, 그때 그 식당에서 초췌한 모습이지만, 묵밥을 앞에 놓고 좋아하면서 웃던 그 사람 얼굴이 떠오른 것입니다.
이 정도도 꽤 직접적인 연관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보다 훨씬, 아무 관계없을 듯한 상황에서도 울컥할 수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어떤 특정 냄새, 예컨대 병원의 소독약, 샴푸, 뭔가 타는 냄새 등등이 특정 기억을 불러일으키면서 울컥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지요.
기일이 가까워지면 유달리 그리워지고, 때로 슬픔이 복받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또한 예측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특정 시기에는 몸이 무의식 중에 반응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해마다 음력 6월이 되면 기분이 저조해집니다. 예민하고, 약간 신경질적이 되며, 우울한 기분이 계속됩니다.
사실 그 이유, 아니 그렇다는 사실조차도 오랫동안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아내가 그런 지적을 하더군요. 그러면서 ‘왜 그리 예민하냐’ 면서, ‘무슨 일이 있으면 차라리 화를 내라’고 하더군요. 그때서야 이야기를 하는 것이, 해마다 그 시기가 되면 이런 상태가 되풀이되고, 그래서 이 시기에는 가급적 나와 부딪치지 않으려고 피한다는 것입니다.
그제서야 여러가지를 따져봤고, 그 결과 그 시기가 어머니 아버지 기일을 앞둔 시기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7살 때, 아버지는 12살 때 각각 돌아가셨는데, 두 분의 기일이 1주일 간격으로 음력 6월인 것입니다. 신기하게도 그 날짜를 인식하지 않아도, 대략 2~3주 전부터 울적한 기분과 날카롭고 예민한 심리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음력이므로 날짜를 따져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데도 몸이 그렇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가 근 40년이 지속되었는데, 그때서야 그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죠. 그 전에는 그 원인을 몰라서 그냥 매년 슬럼프를 겪는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저는 ‘정기 슬럼프’라고 불렀습니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된 지도 어언 2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런 현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거기에 더해 아내가 떠난 시기에 또 한차례 우울을 겪게 되어, 이제 슬픔의 계절이 연간 2회로 늘어난 셈이 된 것이지요.
우리가 계속 슬픔을 이야기하는 것은 망자를 내 삶 속에 살아있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 사람의 방을, 옷을, 물건을 선뜻 치우지 못하는 것은 그가 살아 있는 것 같고, 금방이라도 돌아올 것 같기 때문입니다.
망자를 떠올리게 하고, 울컥하게 하고, 느닷없이 눈물을 쏟게 하는 그 원인들을 처음에는 피하려고 했습니다. 나를 고통스럽게 하니까요. 그러나 지금은 그런 상황이 되면 조용히 눈물을 흘리면서, 또는 상황이 된다면, 울면서 그 슬픔에 온전히 집중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은 내 삶 속에 살아있음을 느끼니까요.
몸이 슬픔을 기억함으로써 상실을 뼈저리게 되새기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지만, 그럼으로써 내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있음을 또한 느끼므로 그것은 슬픔만이 아닌, 또다른 형태의 행복이라 할 만하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