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손길, 나의 머리
머리카락을 자르는 시간은 나와 엄마 사이에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순간이다.
남자의 생명은 머리라고 하지 않나? 나 역시 외모에서 머리 스타일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람 중 하나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스포츠머리로 통일되어 있어서 딱히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만, 그 이후로는 나만의 스타일을 찾아가는 과정이 시작됐다.
어릴 적부터 우리 집의 '전속 미용사'는 엄마였다. 아빠, 나, 동생, 심지어 할아버지까지 모두 엄마가 머리를 잘라주셨다. 미용 기술을 배운 적은 없지만, 전문가가 자르는 것을 눈으로 보고 익히셨다. 그때는 유튜브 같은 정보의 바다가 없었으니 오로지 '눈동냥'으로 배운 솜씨였다. 내가 군대에 가는 날까지 엄마는 내 머리를 손수 다듬어 주셨다.
항상 비슷한 스타일이었기에, 스포츠머리와 상고머리만큼은 엄마의 실력이 점차 늘었다. 웬만한 미용실보다 더 나은 솜씨를 자랑할 정도였다. 그런데 군 전역 후에는 멋을 알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미용실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여러 군데를 돌아다녀도 내가 원하는 스타일을 제대로 만들어주는 미용실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 아내를 만났다. 아내의 친구가 서울대 입구에서 유명한 헤어 디자이너였고, 그분은 나에게 딱 맞는 스타일을 완벽하게 찾아주었다. 몇 년 동안 그분에게 머리를 맡겼지만, 결국 고향인 포항으로 내려가신 이후로 나는 내 머리를 담당해 줄 디자이너를 잃어버렸다.
그때 다시 엄마에게 돌아갔다. 늘 비슷한 스타일만 고수하시던 엄마에게 이번엔 최신 유행 스타일을 부탁드렸다. 엄마는 유튜브로 공부도 하셨지만, 머리를 자르고 나면 나는 여전히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엄마는 내 머리를 자를 때마다 “니 머리 자를 땐 땀이 줄줄 나야!”라며 힘들어하셨다. 하지만 머리 자르는 시간은 엄마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소중한 순간이기도 했다. 요즘은 꽤 잘 자르신다. 약간 어색하게 잘린 부분도 내가 헤어 제품으로 충분히 다듬을 수 있는 기술이 생겼다.
머리를 자를 때면 의자를 화장실이나 거실에 놓는다. 머리에 물을 충분히 묻히고 헤어보를 두른 다음, 의자에 앉으면 엄마의 바리깡 소리가 들리며 컷트가 시작된다. 그 소리는 언제 들어도 익숙하고, 또 편안하다. 어릴 때부터 듣던 그 바리깡 소리가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내 머리카락과 함께하니, 어쩌면 이 순간도 특별한 하나의 의식인지 모른다.
비록 최신 유행은 아니지만, 엄마는 파마도 꽤 잘해주시고, 컷트도 예쁘게 해 주신다. 직장 동료들이 “머리 예쁘네요”라고 칭찬할 때마다 나는 자랑스럽게 “엄마가 잘라주셨어요”라고 말하면, 듣는 사람들은 깜짝 놀라곤 한다.
어느 날 문득 생각해 보았다. 내가 왜 굳이 새로운 미용실을 찾지 않고 엄마에게 머리를 자르는 걸까. 컷트 비용이 비싼 것도 한 이유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엄마가 아들 머리를 자를 때 느끼는 즐거움을 내가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모습을 보는 나도 기쁨을 느끼는 게 아닐까. 어쩌면 내 머리를 자르는 건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엄마에게는 아들이 자라면서도 여전히 곁에 있다는, 그 시간이 영원하길 바라는 작은 의식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그 기쁨을 계속 나눌 수 있도록 나는 내 머리를 엄마에게 맡길 생각이다. 그런데… 이제는 엄마가 머리 자르실 때 짜증은 좀 그만 내야겠지?
요즘은 손주들까지 엄마 손에서 머리를 자르고 있다. 손주들이 할머니 집에 가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머리 자르는 일이다. 2주에 한 번씩은 할머니의 가위질이 이어진다. 아빠, 나, 동생, 그리고 두 손주까지… 엄마의 미용실은 여전히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앞으로도 그 손길은 멈추지 않겠지. 세월이 지나도 엄마의 손길이 담긴 나의 머리카락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쓸 것이다. 그 시간 동안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가, 어쩌면 더 소중한 추억이 될지도 모르겠다.
가끔은 세상에서 가장 단순한 일들이 가장 큰 의미를 지닙니다. 가족과의 작은 순간을 소중하게 여길 때, 그 안에서 가장 큰 행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