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을 앞둔 교장선생님은 그야말로 사내대장부 같은 분이셨다. 넉넉한 웃음과 듬직한 인상 덕분에 그분이 계신 곳엔 자연스레 온기가 스몄다. 학교 곳곳이 선생님의 온화한 미소 덕분에 늘 포근하고 안정된 느낌이었다.
학기 초, 환영회 자리에 참석했을 때 나는 우연히 교장선생님 가까이에 앉게 되었다. 보통 교장선생님과의 거리감을 두려는 다른 선생님들과 달리, 나는 막내라 남은 자리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조금 긴장했지만, 선생님께서 환한 미소로 건네신 첫마디에 마음이 살짝 풀렸다.
“젊은 사람이 옆에 와줘서 든든하네”
회식이 한창 무르익을 무렵, 교장선생님께서 갑자기 입을 여셨다.
“휴대폰이 고장 났는데, 요즘은 뭐가 좋으려나?”
그 말에 주변 선생님들이 여러 기종을 추천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냥 듣고만 있으려 했지만, 어느새 오지랖이 발동하고 말았다.
“제가 대리점보다 저렴하게 살 수 있는 곳을 알아요.”
교장선생님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이셨다.
“어떻게 그게 가능해?”
그 순간 마치 교장선생님께 도움을 드리고 싶다는 마음에 사로잡힌 듯했다. 나는 동생에게 바로 전화를 걸어 대리점 위치를 물어봤고 교장선생님께 지도를 보여드렸다.
“여기 가시면 됩니다!”
하지만 그곳은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야 갈 수 있는 먼 거리였다. 여기서 그만 말했어야 했지만 나는 어쩐지 멈출 수 없었다.
“제가 함께 가드릴까요?”
교장선생님은 손사래를 치며 “아냐, 됐어” 하셨지만 내 속은 불안했다. 어르신이 먼 거리를 혼자 가서 휴대폰을 개통한다 생각하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함께 가기로 약속을 잡았다.
약속한 날 예상보다 먼 길을 함께 가며 나는 마음이 복잡했다.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지 혹시 어색한 침묵이라도 흐르면 어쩌나 걱정이 앞섰다. 그런데 교장선생님은 내가 읽기 어려운 긴장감마저 푸는 듯한 넉넉한 웃음으로 나를 바라보며 담담히 말씀하셨다.
그분의 담담한 질문에 내 입도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학교생활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부터, 우리가 교육자로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대한 이야기까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먼 거리가 점점 짧게 느껴졌다.
교장선생님은 새 휴대폰을 저렴하게 구입하신 것에 만족해하셨고 시간이 저녁을 훌쩍 넘어 있었다.
“저녁 시간이 다 되었으니 저녁 먹고 가자” 하셨다.
뭘 먹을까 혼자 고민하던 중
교장선생님은 나를 비싼 소고기집으로 데려가셨다. 나는 갈비탕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교장선생님은 내 의견을 대수롭지 않게 흘려듣고 바로 고기를 주문하셨다. 그날 저녁 비싼 고기 한 점 한 점이 나에게 주시는 따뜻한 마음 같았다.
식사 자리에서 교장선생님은 눈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참 아들 같아. 먹고 힘내서, 교사 생활도 무사히 잘 해내야지.”
그날 저녁은 단순한 보답이 아니었다. 나를 아끼고 응원해 주고 싶어 하시는 마음이 진심으로 전해졌다
추석 즈음 교장선생님께서 “명절에 며느리가 와도 설거지해야 해서 싫다”며 웃으며 푸념하셨다. 나는 문득 장난기가 발동하여 석고 깁스를 만들어 드렸다.
“이거 차고 계시면 설거지 안 해도 되시겠네요.”
교장선생님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이거 참 재밌구먼! 이번 명절은 좀 편하겠어!”라고 하시며 좋아하셨다. 명절이 지난 후, 교장선생님은 나를 따로 불러 말씀하셨다.
“덕분에 명절 때 오랜만에 푹 쉬었네. 정말 고마워.
이러한 에피소드로 교장선생님과의 특별한 추억 덕분에 조금 더 학교에 정이 들었다. 그렇게 6개월이 흐르고 교장선생님께서는 정년퇴임을 하셨다. 11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SNS에 올라오는 교장선생님의 여행 사진을 보면 여전히 그 넉넉한 미소가 화면 너머로 느껴진다.
교장선생님의 웃음을 떠올리며 나도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분의 넉넉한 미소와 배려심은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교장선생님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미소를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분이 내게 주신 따뜻한 가르침을 오래도록 잊지 않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