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창업가

24년~25년 회고: 스타트업과 '대잡'의 상호보완성

by 반골

1) 2024년 6월

방황하던 나를 재취업시켜주고 삶을 구제해준 분은 스타트업을 코스닥 상장시키는 데 성공한 이력이 있는 알고 지내던 삼촌 뻘의 형님이었다. 그리고 이 형님은 나와 동시에 합류한 지 2개월만에 대표랑 싸우고 퇴사했다. 7월 27일, 28일에 메모어 16기 슈퍼주니어 1차모임 저녁뒤풀이와 조 모임에 가서 하소연을 하고 28일 4시에 대표랑 만나서 긴 논쟁을 했으나 갈등 중재엔 실패했다. 8월 3일에 형님은 내게 "AA아, 사람은 대기업을 찍어보는 게 좋아. 나도 삼성 다니다 나온 걸 버팀목 삼아 벤처 시절을 버틴 거라고. 너도 잘못 꼬이면 OOO처럼 저렇게 사람 잘못 대하는 인간 될 수도 있어."라며 합리화를 하셨는데, 이 형님의 과오와 별개로 이 예언은 1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들어맞아서 8월 말에 내부분열이 터져나왔고 당시 다니던 개발자 3명 중 2명이 9~10월에 퇴사하고 남은 1명도 몇 달 안 가 퇴사한다. 또한 후술하건대 이 형님이 말한 대기업 다녀보라는 러프한 충고가 내 1년 반을 관통하는 면도 있다.


모 명문대 대학원생 몇명이 방학 인턴기간 동안 회사에서 PO역할을 하며 꽤나 기여를 했는데(나랑은 꽤 친했다), 대표는 이전부터 정직원 개발자들을 낮잡아보던 게 이제 직접적인 비교대상까지 생기니까 그들의 심기를 더 건드려서 내부균열이 걷잡을 수 없어진 것이다. 인턴 14명(소규모 회사에서 이 인원수의 인턴을 뽑은 것도 주목할만하다)이 나가자마자 대표는 좋은 사람 가면을 벗어 직원들을 압박했고 직원들은 "내가 커리어 수난을 겪을지언정 지금처럼 밟히면서 너 잘되는 건 못본다" 비슷한 마음으로 보였다. 적나라하게 쓰면 거북한 내용이라 최대한 에둘러 간략하게만 쓰면, 일단 27일에 사회초년생 동료 1명이 나를 부른 후 눈물을 흘리며 호소를 했고 나는 28일에 예비군훈련에 갔다가 다음날인 목요일에 출근해서 아침 회의 직후에 대표가 나를 부른 후에 도무지 동의할 수 없는 말들을 하고는 "어떤 생각이 들어요?"라며 내가 편을 들어주길 바라는 기색을 표했다. 나는 그 전부터 쌓아오던 대표에 대한 거부감이 임계치를 넘어 더 이상 거리낄 것도 없이 직접적으로 비아냥거리는 피드백을 줬다. 나중에 20시에 대표랑 대판 싸웠다. 저 동료는 9월 초에 사직서를 낸다.

14일에 나는 동료와 퇴사한 CTO 형님 간 3자대면을 주선했는데, 내 덕분에 이 형님은 원래도 아쉬울 것 없는 fire족이지만 좋은 인생선배 경험까지 하신 셈이었고 동료는 떨어진 자신감을 조금 회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추석 때 혼자 출근을 했다가 대표랑 더 강한 수위로 싸운 후 9월 19일에 사직서를 냈다. 30일에 나머지 1명의 개발자까지 포함하여 CTO형님과 넷이서 식사자리를 가졌다. 변명하자면 내가 배후중상을 하고다니거나 킹 슬레이어 기질이 있는 위험분자가 아니라 8월 초 이전부터 진작 올 데까지 온 팀이었고 이 사람들의 정신이라도 구제했을 뿐이다.


지금 생각하면 아쉬운 게 지금의 내가 24년 6월로 돌아가면 나 혼자 저 회사를 하드캐리할 수 있었겠어서이다. 괜찮은 사업성에 비해 별로 까다롭지 않은 기술적 난이도였고 lean하게 실험해보기 적합한 볼륨이었고, 저 회사의 쩐주는 IT에 무지한 전문직 사업가였는데 그들이 하는 매우 부정확한 요구사항을 IT적으로 잘 해석해서 구현해주기만 하면 되는 문제였다. 그러지 못했던 이유를 요약하면 내게 최소한의 시행착오와 작은 성공 경험조차도 부재했다는 것이다. 나 자신도 한창 불안정할진대 그 와중에 수 년간 사업이 잘 안되며 핀치에 몰린 대표를 보좌할 정도로 충성심이나 '여기서 망하면 나도 끝이다' 라는 절박함이 있진 않았다.


2) ~2025년

저기를 그만둔 직후에 고맙게도 괜찮은 회사에 들어갔다. 지금에 이르러서 보니 좋은 점 중 하나가, 큰 기업의 생태와 꽤 괜찮게 굴러가는 스타트업의 바이브를 동시에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래저래 고생도 했지만 내가 모르던 영역들을 채울 수 있었고, 만약 내가 2년 뒤에 지분을 팔고 당장 창업을 하여 성공한다면 그건 이 회사에서의 우여곡절 덕이다.

친해진 동료가 소수 생겼는데, 사내에서 나에 비해서 활달한 캐릭터인 사람들이랑 친해진 주된 이유는 내가 그들의 pain point를 일부 직접적으로 해결해주거나 이해하고 어떤 혜안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큰 틀에서 동류이기도 하다. 나 또한 보고 배울 점들이 곳곳에 보여서 가능하면 이들을 모방해보려 한다.


토요일에 한 동료가 내게 학연과 관련된 특정 주제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지 물을 때 나는 또 앵무새처럼 이렇게 대답한다. "미국에선 조지아텍이나 하버드 나오면 테슬라같은 기업에 들어가거나 여타 진짜 세상의 첨단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는데, 한국은 산업구조상 그게 가능한 포지션이 드물기 때문에 애초에 리스펙을 받지도 못하고 있다. 게다가 자기들 스스로도 연봉을 일반 직장인 2배 이상씩 받으면서도 대잡 대잡 거리는 경우가 많은 게, 일을 잘해서 돈을 많이 받는 인과가 아니라 일단 채용되고 나서 고소득이 보장된 후에 시키는 대로 일을 하고 하면할수록 회사의 프로세스에 종속되기 십상인 구조 탓이 크다고 본다. 특히 나같이 자아가 비대한 사람들은 거기서 동기부여를 얻기 어려울 거다, 당장 우리만 놓고 봐도 한명한명의 역할이 큰 회사와 그게 희석돼버린 회사 간에 동기부여와 사내문화 격차가 극명하고. 나는 리스펙을 이끌어내기 위해 앞서 말한 한국사회에서 비교적 큰 굴곡 없이 고소득을 누릴 수 있는 메인스트림에서 이탈한 면이 큰데, 정작 그 무게에 대해 제대로 생각을 안 했고 노력도 안 했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고생중이다."라고 한 후 결론은 "존재의 가치 자체를 의심받고 위협받는 판국인데 누가 더 잘났고 하는 논쟁의 효력이 당연히 약해진다고 생각해서 일단 저 과업을 어느 정도 이뤄놓고 봐야겠다"였다.

이 동료 역시도 하이닉스가 각광받는 주된 이유가 해당 산업의 글로벌시장규모 때문인데 만약 Wellness같은 게 차세대 먹거리가 되어 미국 일본 등등에 수출한다면 우리에게 기회가 열릴 수도 있다고 대꾸했고 내 핀트를 잘 이해해준 것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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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업이 큰 조직에 가질 수 있는 대표적인 우위가

1) 잘난 사람들이 조직을 이루고

2) 다같이 잘난 건 이미 충분히 아니까 서로의 체면보다 집단이 잘되는 걸 우선시하는 스스럼없는 소통으로 시너지를 높이고

3) 이를 통해 강한 추진력과 아이템의 본질을 잘 찔러서 성공시키는


플로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1부터 애매하다면 서로에 대한 유대와 신뢰도 애매해지고 '여기서만 나눌 수 있는 건설적인 대화'가 될 수도 있는 것이 오히려 '별로 인사이트풀하지도 않으면서 신경 거슬리게만 하는 강한 주장'이 되어버리는 빈도가 높아진다. 그런데 또 여기에 대해 신경쓰기 시작하면 본질에 다가가기 위한 솔직함이 아니라 사기를 꺼뜨리지 않기 위한 체면 문화가 득세하니 애초에 1과 2가 잘되지 않으면 소위 비전지향적인 스타트업은 성립할 수 없다고 본다.

물론 이런 걸 떠나서 최악의 시나리오는 그냥 평범하게 기업 들어가서 사회생활만 경험했어도 모방할 수 있을 괜찮은 상사들의 리더십과 동료상들이 안좋은 스타트업으로 커리어를 시작하면 아예 부재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내가 그런 대표라면 문제가 더 클 거고. 스타트업 다니다가 힘들어서 이직한 분들의 사례를 좀 들어봤는데 여기에 해당하는 경우가 꽤 있어 보였다.


비전지향적인 스타트업들이 대체로 레브잇처럼 경험은 부족하더라도 처음부터 포텐셜이 높은 걸로 정평이 난 사람들로 출발했다는 공통점이 있는 이유이다. 비전지향의 반대로는 안정적인 리더십으로 스타트업을 이끄는 관리자형 CEO가 있는데, 전자로 출발한 스타트업도 구성원의 다양성이 높아지는 시점부터는 안정적인 리더십이 반드시 필요해진다. 아니면 세간에 알려진 일론머스크처럼 진짜 혼자서 뇌지컬로 다 찍어누르는 총괄이 가능하거나.


이미 역량을 어느 정도 입증한 연쇄창업가나 시리즈A 이상의 스타트업들을 접해 보면 지성과 관리 경험을 두루 갖춘 걸로 보이는 분들이 많았다. 물론 너무 기본이 안된 반대사례들과 비교하여 높은 하한을 형성한다는 의미일 뿐이고 얼마나 뛰어난지는 같이 일해봐야 파악할 수 있다.


요컨대 큰 조직의 나약한 개인으로 생존해온 사람들은 내 입장에선 회피적이고 진짜 중요한 문제를 논하기에 부적합한 부분들이 보였던 반면, 자기가 조직의 명운을 주도하게 되는 환경에 있은 사람은 (나도 상당히 해당하는 얘기이지만) 좀 '개념이 없게 보일 수도 있는' 면면이 있을 수 있다. 전자는 말을 해야 할 시점에 성격이나 식견이 안 받쳐줘서 안 하는 안티패턴이고 후자는 충분히 안전하지 않은 환경에서 발화의 가치에 비해 너무 저돌적인 말을 하는 안티패턴이다. 만약 특별한 사람임을 어느 정도 선보인 상태라면 후자의 특성이 오히려 역량을 투명하게 내보일 수 있는 특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역효과를 내기도 한다고 느낀다.


앞서 큰 조직과 스타트업의 특성을 동시에 섭렵해서 유익하다고 했는데, 큰 조직에서 체계를 경험하고 모난 면을 감추는 법을 체화한 사람들이랑 친해진 후에 이들로부터 '스타트업이면서 수준이 아주 아웃라이어까지는 아닌 집단이 시기상조의 과한 확신을 가질 경우'에 대한 문제의식을 들을 수 있어 도움이 되었고 경각심을 느꼈다. 현재 다니는 회사의 성공을 견인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가능성이 있고, 나중에 내가 좋은 리더가 되는 먼 여정에도 도움이 되는 시각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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