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자의 본능 혹은 미망에의 집착. 김재진 '아름다운 사람'
아이고 어른이고 여자고 남자고, 긴 팔은 기본이고 겨울 점퍼에 깊게 후드를 뒤집어 쓰고 마스크를 하고 그 위에 모터바이크용 헬멧을 썼다. 이것이 그들의 기본 외출 복장이다. 사시사철 똑같다. 지금 이곳의 하루 중 온도는 최저 17도 최고 24도, 우리나라 정상적인 사계절 아래에서 본다면 늦은 봄? 그런데 딱 겨울, 한겨울 복장이다. 좋아하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길을 걷다가 이 광경이 새삼 눈에 들어온다, 나의 마음에 들어온다. 아, 내가 좋아하는 그 나라에 지금 나는 와있구나! 그리고 또 한 가지, 나는 참으로 시원한 상태에 있구나 몸도 마음도 나의 영혼도!
흰 피부 색깔에 유난히 집착하는 사람들, 이 나라의 젊은 여성들도 그렇다. 굳이 나쁘게 보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움을 위한 것이라 하지 않는가? 필리핀에서는 피부 색깔로 그 사회적 신분을 짐작한다고 한다. 거의 맞는단다. 무슨 말인지 짐작은 간다. 오랜 시간 반복되는 그들 각자의 삶의 방식이, 종국에는 그들의 피부 빛깔까지 결정짓는 것이다. 흰 피부, 햇빛에 힘들게 그을린 피부, 그 얼굴의 하얀 웃음 그리고 거무스름 힘들게 그을린 얼굴.
아들 녀석 어릴 때 내가 자주 이런 말을 그에게 했다. "계급 없는 사회는 있어도 계층 없는 사회는 없다" 공산주의에도 사회주의에도 계층은 있다. 그들의 계층간 격차는 더욱 심하다. 아이러니다. 그나마 사회주의는 애초, 처음부터 '우리는 당신 노동자들과는 다른 사람이오. 당신들도 알지요? 그러니 우리의 가치를 인정하고 우리의 다름을 인정해 주시오. 뭐 우리가 많이 먹지는 않겠소. 딱 우리 몫만큼만 떼고 나머지는 다 당신들에게 그대로 돌려주겠소.' 딜은 성립되었고 그것이 우리가 보고 있는 사회주의다.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를 피할 때 우리는 윗옷을 덮어쓴다. 한낮의 햇빛을 피할 때 이 나라 젊은 여성들은 윗옷을 틈하나 남김 없이 완벽하게 뒤집어쓴다. 그렇게 햇빛은 차단된다. 하나, 그 순간에도 그들은 전혀 덥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것 같다. 그저 꼭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니까, 그들로서는. 둘, 이로써 (지금의 이 뒤집어씀으로 인해) 조금은 더 희어지고 예뻐졌다는 생각이 그들을 덥지 않게 할 것이다. 생각의 힘은 이처럼 무섭다. '심생즉 종종법생' (마음에서 생겨나면 모든 것이 생겨난다, 원효대사의 깨달음이다)!
사실 흰 피부 아니어도 그들 각자 이미 독특한 매력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인데! 동양인 같지 않은 신체 비율도 그렇고 맑은 웃음도 그렇고, 그들의 여전한 친절함도 그렇고. 의욕일까 욕심일까, 아니면 여기서도 자신의 최선을 다하고 싶은 선한 마음인가?
일부러 돈을 주고, 돈을 들여 피부를 건강한 구릿빛으로 태우는 사람들도 있다. 결국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선택의 문제다. 보는 방식의 문제이고 다수의 생각이 어떤 것이냐가 선과 악, 옳고 그름의 최종적인 판단기준이 된다. 그것이 모든 집단적 구성체의 기본 룰이다. 인간이 모든 동물사회에서 가장 강한 존재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의 집단의 규모가 다른 어느 동물 집단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기 때문이다. 어느 인류학자가 한 말이다. 결국은 크기가 중요하다 (Size matters)!
늘 궁금한 것이 있었다. 여전히 궁금하고 아직도 그 해답은 얻지 못한 상태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대개 수컷이 그 외모를 꾸미고 아름다움을 통한 상대의 유혹에 힘쓰는데 왜 인간의 세계에서는 유독 그 반대의 현상을 보이는 것일까? 조류는 일곱 빛깔 무지개색을 다 본다. 닭의 수컷, 꿩의 수컷 (장끼), 공작의 수컷, 사자의 수컷... 그들은 멋지다. 그런데 새의 암컷은 정말 볼품이 없다. 그렇게 진화되었다. 개는 색맹이다, 아니 거의 색을 구별하지 못한다. 검거나 회색이거나 그저 그런 흐릿함이다. 의외로 시력 또한 그리 좋지는 못하다. 인간은 23미터 이내의 물체를 구별할 수 있지만 개는 겨우 6미터다. 어느 외국에서 아침 산책을 하던 중 유난히 나를 보고 짖는 개들 때문에 고생한 적이 있다. 처음에는 내 빨간색 트레이닝복 때문인 줄 알았다. 그러다가 알게 되었다. 개는 색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다시 이전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왜 인간은 여성이 더? 지금이야 많이, 크게 달라졌지만 과거에는 남자 중심의 생활이었기 때문일까? 그들이 경제권을 비롯한 권력을 쥐고 있으니, 그들이 선택을 하는 입장이니 그래서일까? 동물의 세계에서는 본능의 요구에 의한 종족의 번식 이외의 경우에는, 성의 역할 혹은 그 복잡다단한 역학관계는 그리 중요한 요소는 아닌 것 같다. 유독 인간세에서만 복잡하다. 그래서 이런 쉽게 읽어내지 못할 여성의 멋내기와 남과 여 그 힘겨루기와, 성을 둘러싼 그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여성들의 멋내기 또한 진화의 결과일까?
시인 김재진의 시 '아름다운 사람', 제목부터 아름답다. 시는 줄줄이 더욱 아름답다. 시를 읽어내려가는 내 마음 또한 아름다워진다. 그것을 나는 느낀다.
가까운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와 피로감은 더욱 크다. 겁이 나서 서둘러 그동안 아무 생각없이, 그야말로 순진하게 ('나이브' naive - 경험이 없는/판단력과 지식이 없는/그렇게 고지식한) 열어두었던 마음의 문을 이제는 닫는다. 그런데 외부로부터의 들어옴을 성공적으로 차단한 것인가 아니면 내가 나가는 그 유일한 길을 내 손으로 막아버린 것인가? 사랑한다고 믿었던 사람이 어느 날 두렵게 느껴지면? 그때는 또 어찌할 것인가? 그들이 내게 이런 부당한 대우를 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지레 겁먹고, 그것도 아니면 나의 혼자만의 욕심에 그렇게 미리 큰 선을 그어버린 것일까? 그들이 그랬든 당신이 그랬든, 많이 늦은 지금에라도 그 그었던 선을 지우라. 닫아버렸던 그 마음의 문을 어서 열어라. 모든 것 내려놓아라, 석가모니불의 무아처럼. 용서하라, 당신을 피로하게 했던 그 친구도, 갑자기 낯선 사람의 모습으로 당신 앞에 두려움으로 나타난 사랑하는 사람도 용서하라. 아니 당장 당신 자신을 용서하라. 그 용서가 결국은 모두에게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이니. 그 마음의 평화 영혼의 평온을 그저 담담하게 받아들이면 된다. 고맙게 받으면 된다. 아름답게 받아들이면 된다. 어쩌면 그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일 것이니! 우리 몸의, 마음의, 그리고 영혼의 빛나는 아름다움일 것이니!
여성들의 자기 가꾸기, 미를 향한 눈물 나는 노력은 그저 아름답게 보아주시기를! 봄날의 날씨 속에 한겨울 복장을 해야만 하는 그들의 그 절실함을 헤아려주시기를! 부디 그런 방식으로라도 그들이 좀 더 아름다움에 가까이 가기를 진심으로 기원해 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