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은 들춰보자, 삶과 허무. 최인훈 '아카시아가 있는 그림'
아카시아와 저와의 인연은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모든 일에는 그 시작이 있는 법, 다만 많은 경우 그 처음을 기억하지 못할 뿐. 국민학교 때 수업이 끝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던 그때, 어디선가 묘한 향이 느껴졌다. 원래 향에는 유난히 민감한 편이라 그 향을 따라 갔다. 집에서 만든 플레인 요거트 향 같기도 하고 밤꽃의 향기 같기도 했다. 동물성의 향수는 당연 아니었고 식물성, 그것도 결코 과하거나 자극적이거나 자신을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는, 약간의 수줍음까지 있는 은은함 그 자체였다. 드디어 찾았다!
그런데 그때 정작 나를 사로잡은 것은 그 하얀 포도송이 같은 아카시아의 꽃이었다. 쌀을 튀겨서 두 개를 하나로 붙여 포도송이에 촘촘이 빼곡하게 달아놓은 듯한 모습. 까지 않은 잣알, 그러나 그 색은 자줏빛이 아닌 흰색, 골프채 아이언 모양의 그 독특한 생김새. 나는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서 선한 모습의 풍성한 아카시아꽃을 바라보고 그윽한 향을 맡았다.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늦은 봄 이른 여름이 되면 늘 아카시아꽃 향기를 기다리고 그 예쁜 꽃송이를 만나는 기쁨을 즐겼다.
어른이 되어서는 어느 날 아카시아나무로 만든 원목 식탁이 눈에 들어왔다. 마호가니나 월넛의 화려함이 아닌, 그저 수수한 모습의 자연 무늬 그대로를 드러내고 있는 담백한 생활 가구. 그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고 와인을 마시면 아카시아향이 그대로 느껴질 것 같았다.
아카시아꽃이 지고 조금 더 지나면, 아카시아꽃 향기가 더욱 그리워지게 만드는 어떤 활엽수와 그 꽃의 향이 등장한다. 얼핏 처음에 맡으면 아카시아향과 살짝 비슷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짝퉁이다, 그런 짝퉁이 없다. 역하고 그래서 불편하기까지 하다. 혹시 식물 분류상 같은 '문'에 속하는 나무일까? 내 욕심에는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카시아는 그저 내가 아는 아카시아이고, 그 이상한 냄새의 나무는 그냥 그 나무이고 그렇게!
소설가 최인훈님의 이 시를 아는 분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시를 이미 알고 있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여러 단계를 거치셔야 하기 때문이다. 우선 소설가 최인훈을 아는 분일 것. 그리고 그의 소설 '광장'을 읽어야 한다. 그러고도 그 소설 앞머리에 나오는 이 시가, 정작 시인 줄 알아보지 못하고 후일 시간이 많이 지나 혹시 이 양반이 쓴 시는 없을까 뒤늦게 궁금함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이 시를 만날 수 있다.
나는 소설가 최인훈의 존재를 이미 알고 그 소설도 읽은 사람이지만 거기에 나온 이 시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아마 수십 년 시간이 흘러 지금의 내 기억에는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그런 내게 엊그제 문득 이 분이 쓴 시는 없을까 하는 호기심과 궁금증이 생겼다, 그렇게 이 시를 만났다! 기뻤다. 헤르만 헤세나 빅토르 위고처럼 외국의 대문호 소설가들의 시는 여러 편 읽을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국내 소설가가 쓴 시를 정신 차리고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앞으로도 부지런히 찾아볼 생각이다, 한국의 소설가들이 쓴 시.
'돌은 꼭 들춰보자', 한두 해 전부터 제가 일상 속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덕목 중 하나입니다. 어릴 때 어머니가 자주 그러셨지요, "입 두었다가 뭐 하려고?" 물어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수줍음에, 괜히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기 싫어서, 그 알량한 자존심에, 웬만하면 묻지 않고 청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아쉬운 대로 일상을 살아가는 저를 보고 어머니가 하신 인생 큰 어른으로서의 귀한 조언이었습니다. 하지만 청년이 되고 중년이 되고 장년의 나이가 되어서도 저는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노년의 어느 시점에 이르렀을 때 어느 날 문득 이런 깨달음에 도달했습니다. "어차피 내 앞에 놓인 돌, 그저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숙이고 손을 들어 그 작은 돌 뒤집어 보면 되는 일, 그게 뭐 그리 힘들다고? 따로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더욱 아니고? 혹시 아나? 저 돌 밑에 신이, 섭리가, 아니면 내가 좋아하는 스피노자의 그 자연이 나를 위해 준비해 둔 멋진 그 무엇이 있을지? 들춰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 아닌가?"
이후 저의 일상은, 제 삶은 크게 작게 많이 바뀌었습니다. 당연 기회가 많아졌고, 그 기회에 대한 합리적 기대와 바람 또한 많아졌습니다. 그만큼 삶이 적극적으로 변했고 저 자신 조금은 더 용감해졌습니다. 신기하게도 그런 제 모습을 바라보는 제 주변의 분들도 많이 좋아해주셨습니다. 좋은 현상이라고, 잘하는 일이라고, 계속 그리 하라고! 사실은 브런치에 이렇게 글을 올리는 것 또한 이 '돌 들춰보기'의 결과입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이제 이 시를 보자. 시는 시간의 흐름, 계절의 바뀜을 그대로 따르면서 진행된다. 봄이 되고 아카시아의 푸른 새싹이 마치 '향긋한 버러지처럼' 움터 나오는 모습을 보며 친구는 푸른 하늘처럼 한껏 부풀어 있다. 멋진 서막이 그들 눈앞에 바짝 다가온 듯 하다고 자신감 가득 그리 말하면서.
또 한참의 시간이 흘러 만개한 아카시아꽃을 보며 그 친구는 여전히 그 달콤한 꿈 속에 있다. 삶은 참으로 멋있다고, 기막힌 것이라고 아카시아꽃의 이 향기처럼. 그러나 그후 시간이 얼마쯤 흐르자 그의 삶에 대한 그 장밋빛 생각은 많이 바뀌어 있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무튼 대뜸 '삶은 섬뜩한 것이야' 이리 내지른다. 단단해진 아카시아 가지를 보며 그리 말한다, 삶은 녹녹치 않다고, 단단하다고.
그동안 지금까지 계절이 바뀌고 시간이 흐를 때 아무 말 없이 그저 친구의 내뱉는 말을 들어만 왔던 시인은 이번에도 결국 아무런 말을 않는다, 그저 친구의 그 순진함과 답답함을 피워문 담배 한 대로 말없이 표현한다. 그걸 여지껏 몰랐느냐고, 의기양양 당장 하늘의 별이라도 딸듯 싶던 그 자신감은 어디로 갔느냐고, 그리 속으로 일갈한다. 삶은 멋있다면서? 그런데 왜 갑자기 그리 바뀌셨나? 세상 물정 모르는 이 부잣집 도련님아!
시인의 말없는 그 말을 들은 것인지, 아니면 여전히 그 특유의 아무 생각 없음의 또 다른 형태인지, 친구 또한 시인을 따라 담배를 꺼내문다. 둘은 그렇게 말없이 아카시아 우거진 언덕을 걸어간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은 사실 젊은이들이 읽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소설이란 생각이 옛날부터 들었다. 그저 이념, 이데올로기라는 어쩌면 차라리 단순한 흑백논리 속에, 그리고 아마도 이미 정해놓은 자신의 결론 속에, '다 읽었다' 하는 의무감 탈출의 기쁨을 위해 읽었을지도 모른다. 내 생각에는 이 소설 속에서 작가는 이데올로기 그 이상의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삶에 대해, 우리네 삶의 본질과 그 고뇌에 대해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젊은 시절의 나는 작가가 나에게 던진 그런 근본적 의문과 갈등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그런 번민과 갈등의 존재에 대해 알지 못했다. 이 소설은 나이 들어 다시 한번 읽어야 한다고 내가 생각한 이유이기도 하다.
요 며칠 소설의 서문격인 이 시를 읽고 나니 나의 그런 생각은 더욱 힘을 얻는다. 바쿠닌의 무정부 혹은 무권위주의가 새삼 우리들의 주의를 끌기에는 우리 모두 오늘날의 이 제도와 시스템 하에서의 삶에 이미 너무도 익숙해져 있다. 또한 단지 이쪽이냐 저쪽이냐, 이것이냐 아니면 저것이냐의 그런 단순 논리가 우리 삶을 지배하는 기본명제라면, 우리 인간들의 삶은 차라리 훨씬 단순하고 명쾌하고, 그래서 한결 더 살기 수월한 것이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한다. 불행히도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세의 삶은 이데올로기 그것보다 몇 배는 더 복잡하고 힘든 것이다. 결국에는 뒤늦게 깨닫는 삶의 허무함인가? 그 씁쓸함인가? 친구의 이 말에도 저 말에도 아무런 대꾸나 반응을 보이지 않고, 하지만 더는 참지 못하고 그저 담배 한 대 피워무는 작가의 그 씁쓸함이 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
삶이 향긋하고 그저 순수한 아카시아꽃 향기만 같다면 얼마나 좋으랴!
#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바쿠닌 -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Anarchist 무정부 무국가 무권위주의자). '파괴를 향한 열정은 창조의 열정이기도 하다'는 말로 유명하다. 당시 카를 마르크스와 함께 제1 인터내셔널을 이끌었던 사회주의 혁명가의 두 기둥 중 하나였다. 후일 마르크스와는 사상적 견해 차이로 갈라섰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는 바그너의 대작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에 대해 평한 자신의 책에서 지크프리트를 '젊은 바쿠닌'이라고 불렀다. 바쿠닌과 리하르트 바그너는 아주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