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과 지성 중에 하나만 택하라면 당신은 어느 것을?

- 중용은 힘들다, 우연히 그리되기 전에는. 아르튀르 랭보 '센세이션'

by 가을에 내리는 눈

아들 녀석이 여섯 살 때쯤 함께 영국의 어느 발리 구두 샵에 갔을 때의 일이다. 열심히 구두를 고르고 있던 내게 불쑥 자기가 고른 구두 하나를 내민다. '아빠, 이거로 해요!' 내 마음에 들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어린 아들이 나름 열심히, 신경 써서 고르고 내게 권하는 것이라 두말 않고 그것으로 했다. 그 후 내가 비즈니스상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꼭 그 구두를 챙겨 신고 갔다. 그때마다 모두 좋은 결과를 보았다.


아들의 감각은 늘 좀 독특했다. 번뜩이는 그 무엇인가가 있었다고나 할까? 어려서부터 그랬고 나이 들면서 그 감각적 선택의 탁월함은 더욱 빛을 발했다. 나는 그것을 알아보았고 언제나 존중했다. 내가 충분히 나이 든 지금은 그가 나의 모사 장자방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세운 일등공신, 책략가 장량)이다. 자주 그에게 조언을 구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떠나 그와 나는 지금 그야말로 '전략적 동반자 관계'다. 든든하다!


나는 감각적 본능 혹은 직감적 통찰력에 약하다. 항상 이성과 지성, 입증된 데이터나 사례에 의존하고 싶어한다. 물론 다소 안전한 면은 있다. 큰 위험에 빠지는 일은 조금 줄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네 세상사가 언제나 그런 데이터와 이성과 논리에만 근거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차라리 그랬다면 오히려 살기 쉬운 삶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 모두 잘 안다. 그래서 문제는 일어난다.


감각이냐 지성이냐? 헤르만 헤세의 소설 중에 '나르시스와 골드문트'라는 것이 있다. 젊은 시절 푹 빠져들어 여러 번 읽었다. '지와 사랑'으로 번역되어 나왔는데 적절한 번역이었다고 그때도 생각했다. 양 극단에 집착하는 두 사람, 누가 맞고 누가 그르고 결국 정답은 없다. 항상 그렇듯이 양쪽 모두에게 각각의 프로와 콘, 장단점이 있다.


이때 우리는 말한다, 결국은 중용이 중요하다고. 그 중간을 취해야 한다고. 누가 모르나? 그게 현실적으로는 쉽지 않고 거의 불가능한 미션이니 그렇지! 쌀 반 보리쌀 반 섞는 것처럼 그리 쉽다면 이 세상 사는 것은 애초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가 현실 사회에서 직면하는 딜레마는 쌀 반 보리쌀 반 그런 단순 산술 계산이 아니다.


이제 나이 들어 지난 날을 돌이켜보면 좀 더 감각적으로 살았어도 좋았겠다 그런 생각이 든다. 한번 내질러도 보고 엄청 깨져도 보고 뭐 그런 좀 다이내믹한 삶? 물론 당연 '죽지는 않는다는, 완전히 깨지고 무너져서 다시는 제대로 일어설 수 없는 그런 지경에만 처하지 않는다면'이라는 웃기는 단서가 붙는다. 그러면 누구나 다 하지? 그게 나다, 여전히 나다!


믿거나 말거나, 혈액형상으로는 B형 혹은 AB형들이 대체로 순발력 뛰어나고 현장에서의 즉각적 판단력과 대응능력이 뛰어나다고들 말한다. 내 주변을 살펴봐도 대충 맞는 얘기인 것 같기는 하다. 그들은 대체로 감각적 판단을 중하게 생각하고, 용감하고 결단력있는 결정과 행동을 보인다. 이런 저런 것을 다 떠나서 일단은 그들은 자신의 그때의 감정에 충실했던 것 아닌가 하는 부러움이 있다. 결과의 문제와는 별도로 (사실 그렇게 쉽게 '별론으로 하고'라고 말할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우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용감함과 그 실행력, 부럽다 나로서는.


오늘 시의 시인 아르튀르 랭보를 시인으로서의 빅토르 위고 그리고 헤르만 헤세와 비교하면 금방 그 두 그룹의 차이가 명확해진다. 그래서 어느 쪽의 삶의 질과 수확의 총량이 더 컸는지는 그야말로 주관적 인식의 문제이니 여기서 말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분명 그들은 아주 다른 삶을 살았다. 그 삶의 궤적이 많이 다르다. 그럼에도, 빅토르 위고와 헤르만 헤세의 그 안정적이고 예측가능한 삶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나는 슬쩍슬쩍 랭보의 인생이 내 마음에 들어오는 경우가 있다.


역사에, 우리네 인생에 가정 ('혹시 이랬다면 어땠을까?')은 없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왓 이프 (what if)?'의 어리석은 가정을 해보고는 한다. 하지만 다른 글에서 내가 말한 것처럼 단 한 번, 그것도 복기 (바둑을 다 끝내고 나서 두 기사가 처음부터 다시 하나하나 그들이 두어온 수를 뒤짚어보는 과정)의 목적에서만 왓 이프는 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후회와 아쉬움과 습관적인 넋두리에 다름 아닌 것이 되고 만다.


'과거는, 지나간 일은 그것으로 이미 매몰비용 (썽크 코스트 sunk cost - 써버린, 지출된, 사라진)이다. 이미 내 손에서 빠져나갔다. 자꾸 돌이켜 본 들? 물론 한 번쯤은 그 과정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잘못된 결과로 이어진 경우에는. 다음을 위해, 미래를 위해 그리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


이제 오늘의 시를 본다. 멋진 시다, 아름다운 시다. 여전히 가슴을 설레게 하는 시다. '여름날의 푸른 저녁들, 발밑에 느껴지는 짧은 풀의 촉감, 꺼끌거리는 밀밭, 한낮의 꿈, 나를 적시는 불어오는 바람, 그 순간 말은 필요없다, 생각은 더욱 불필요하다, 그저 느낀다 나의 감각이 하는 대로, 나의 영혼 속에서 무한한 사랑이 피어난다, 나는 멀리 갈 것이다, 그저 눈앞에 보이는 길을 따라 정처없이 떠나는 집시들 처럼, 내가 어느 아름다운 여인과 함께 있는 듯 기쁨이 가득한 상태로'.


감각 (Sensation)

- 아르튀르 랭보

푸른 여름날의 저녁마다, 나는 그저 길을 따라 간다,

그렇게 마냥 짧게 자란 풀 위를 걷는다,

밀밭의 밀들은 나를 따끔따끔 찌른다 :

한낮의 몽상 속에서 나는 발아래로 서늘함을 느낀다.

나는 불어오는 바람이 나의 드러난 머리를 흠뻑 적시게 내버려둔다.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으련다 :

하지만 끝없는 사랑이 내 영혼 속에서 가득 솟아난다 ;

그렇게 나는 멀리 갈 것이다, 아주 먼 곳으로, 집시처럼,

시골길을 지나 - 마치 어느 여인이 나와 함께 있는 것처럼 기쁨에 가득 차서.


<우리말 번역 - 가을에 내리는 눈, 영어 번역본을 바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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