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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내게 지어준 '거룩한' 시 두 편

- 나의 아버지를 경외함. 데이빗 김 '가을에 내리는 눈'

by 가을에 내리는 눈

어떤 경우에는 시를 읽다가 시인에게 한 번 물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아무리 읽어봐도 이 부분은 도무지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다고, 그러니 내게만 좀 살짝 알려달라고. 예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우려도 들지만 워낙 궁금하니까! 그런데 사실 쉽게 물어볼 방도도 없다. 아는 사람도 아니고 옆집에 사는 분도 아니고. 더구나 이미 다른 세계에 계신 분이라면 방법은 없는 것이다. 그저 그분이 이곳저곳에서 얘기한 것들에 가깝게 접근할 수 있기를 기대할 뿐. 그 속에 작은 단서라도 있기를 그리 바랄 뿐.


시인에게 특정한 시와 관련한 이것저것을 물어볼 수 있는 기회를 딱 한 번 손에 넣은 적이 있다. 물론 자유롭게, 마음껏 물어보았다, 아무런 부담감도 없이. 상세 설명으로 제일 유명하다는 참고서를 옆에 두고 있는 그런 든든함이었다. 당연 내가 읽은 시 두 편에 대한 나의 궁금함은 거의 다 해소되었다. 무엇보다 그런 특권을 누린 내가 조금은 대단해 보이기까지 했다. 기분 좋았다.


지난 해 시월 아들 녀석 집에서 3주 정도 꿈같은 시간을 보내고 이제 헤어질 시간이 가까워 온 그때였다. 내가 있던 곳으로 떠나기 이틀 전, 불쑥 아버지를 위한 시라며 영문 시 한 편을 내놓는다. 생전 처음이다. 서둘러 읽었다. 아주 좋았다. 작가에게 뭘 좀 물어봐도 되겠느냐고 양해를 구하고는 묻기 시작했다. 나는 이 부분을 이렇게 이해하고 이렇게 새기는데, 너는 어떤 의미를 의도한 것이냐? 여기서는 이런 향기가 나는데 내가 바로 맡고 있는 것일까? 어떻소 시인 선생? 참으로 신선하고 조금은 신비롭기까지 한 경험이었다. '야곱의 사다리'에서 야곱이 천사들을 보고 하늘 나라를 보고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을 그때의 기분이 이랬을까? '천사와의 씨름'에서 허벅지 관절을 다치면서도 결코 쉽게 물러서지 않았던 그의 상황이 이와 비슷했을까?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 혹은 하나님과 함께 싸우는 자'. 쉽게 할 수 없는 귀한 경험!


공항에서 짐을 부치고 아쉬움과 미련 속에 그냥 잠시 헤어짐을 미루고 있던 그 시간. 아들은 자리를 잡더니 카페 한쪽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쓴다. 표정 또한 자못 심각하다. 마치 프랑스의 논술시험 바칼로레아를 치르는 사람 같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내게 내미는 영문 시 한 편. 엊그제 시의 후속 편이란다. 반가움과 기쁨 속에 읽는다. 좋다! 전 편의 정서와 주제가 그대로 이어진다. 그래도 몇 가지는 또 물었다. 언제 다시 가질 수 있는 기회일지 아무도 모르니까!


이렇게 해서 아들에게서 받은 소중한 시 두 편은 지금 내게 있다. 시인이 서명한 자필 원고도 있고 혹시 몰라 찍어둔 사진도 있다. 물론 내 마음과 내 머릿속에도 잘 간직되어 있다. 시인의 아버지가 아니고서야 나처럼 살면서 아들에게 시를 받아본 아버지가 이 세상에 몇이나 있겠나? 그저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그 마음이 고맙다. 베토벤에게 곡을 헌정받은 여인들의 기쁨과 영광스러움이 이러했을까?


'아버지의 그 행동은 참으로 거룩한 것이었습니다', 언젠가 아들 녀석이 내게 한 말이다. 우리가 살면서 '거룩하다'라는 말을 들어볼 일은 거의 없다. 누구에게 감히 하지도 않는다. 신에게나 할 수 있는 그런 말. 그 말을 다른 사람 아닌 사랑하는 자식에게서 들었다. 한동안 황홀한 감격 속에 있었다. 벅찬 감동이었다. 이 시 두 편은 그가 말한 거룩함에 대한 그 나름의 가시적 표현이었던 것 같다. 다짐 혹은 의지의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 거룩함과 합쳐진 이 두 편의 시는 그래서 내게는 '속세의 경전'과도 같은 것이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이제 그가 내게 써 준 시 두 편을 본다. 굳이 해설은 않겠다. 나만의 것으로 간직하고 싶은 욕심과 자부심 때문이다. 이렇게 여러분과 공유하는 것은, 곧 완성될 내 첫 브런치 북의 마지막 글을 위함이다. 그것이 제 글을 읽어준 분들에 대한 내 고마움의 표시가 될 것 같은 믿음에서이다.


가을에 내리는 눈 (Autumn Snow)

- 데이빗 김

대지를 붉게 피로 물들이면서

얼마나 평온하게 그리고 부드럽게 그들은 떨어지는가

지난 날의 여러 희망과 꿈들


이제는 후회와 의심과 죄책감을 지나서

경작할 광대한 땅이 여전히 남겨져있고

희미하게 가려진 실현할 새로운 꿈들이 있으니


의무감 마저 느껴지는 하루하루가 나에게로 떠오른다

<우리말 번역 - 가을에 내리는 눈>


내일을 위한 씨앗들 (Seeds of Tomorrow)

- 데이빗 김

대지를 붉게 물들이며 얼마나 사뿐히 그들은 떨어지는가

어제의 낙엽들


이제는 회한과 회의와 슬픔을 뒤로 하고

어떻게 어떤 식으로 해낼 지 아직은 정확히 모르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황량한 땅에 내일을 위한 씨앗을 심을 것이다

<우리말 번역 - 가을에 내리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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