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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게로 와서 나를 안아주세요

- 결핍, 그럼에도 나는 희망. 가을에 내리는 눈 '외로움 혹은 두려움'

by 가을에 내리는 눈

지난해 아들 녀석 집에서 아들을 만났을 때, 3주간의 꿈 같은 시간을 함께 하고 헤어지기 며칠 전 아들은 내게 영어 시 한 편을 써 주었다. 정말 마음에 들었다. 공항에서 이별하던 날 그 아이는 다시 내게 영어 시 한 편을 써 주었다, 후편이라고. 공항 내 어느 카페에 앉아 마치 프랑스 논술시험 바칼로레아를 보는 학생처럼 그 자리에서 쓰고 고치고를 반복하더니 드디어 내게 쑥 내민 그 귀한 시.


힘든 비행 끝에 내가 사는 곳으로 돌아와 나는 그 두 편의 시를 우리말로 옮겨서 다시 아들에게 보냈다. 여전히 한국말을 아주 잘하는 그이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번역한 너의 이 시를 기억하라고, 그리고 간직하라고 아름다운 아버지와의 추억과 함께. 그 후 어느 날 새벽잠에서 깰 시각, 나는 비몽사몽간에 시 한 편을 쓰게 된다. 약간의 신비함 속에 나는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얼른 핸드폰 메모장에 옮겨 놓았다. 단 한 번도 고치지 않았다. 나의 인생 첫 시는 이렇게 탄생했다.


나에게 시란? 내 마음을 글로 옮겨놓은 것. 누군가의 아름다운 마음의 단상을 내가 읽는 것. 그의 마음을 읽고 생각을 읽고, 그의 바람을 읽어내는 것. 어쩌면 감추어진, 희미하게 보이는 그녀의 눈물을 보는 것. 그러나 결코 슬프기만 한 눈물은 아님을 아는 것, 그리고 그녀와 함께 나도 다시 힘을 내는 것. 그것이 내게는 시다.


모든 형태의 궁핍과 결핍은 사람을 힘들게 한다. 당연하다. 내가 이리 당연하다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것은 당장은 달리 방법이 없다는 경험의 토로다. 그래서? 그러니 우선 수용해야 한다,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그들도 조금은 내게 부드러운 자세를 취한다. 어느 시인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기껏 나를 생각해서 찾아온 병조차도, 내가 자신의 그 깊은 뜻을 모르고 그저 저항하기에만 바쁘면 오히려 내 옆에 오래 머무르며 끈질기게 나를 설득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그의 마음을 알아채고 그에게 기대고 그를 믿으면, 그 순간 그는 바로 나를 떠나간다. 어느덧 생겨난 나의 아쉬움도 뒤로 한 채로 그렇게.'


크게 잘난 것은 없는 나지만 그래도 자랑할 것 하나는 있다. 어려서부터 그랬다. 나는 쉽게 지지는 않는다. 좌절한다, 괴로워한다, 늘 두려움에 가득하다. 그러나 결국에는 다시 정신을 차린다. 전열을 재정비하고 살아낼 방책을 강구한다. 그리고는 마침내 일어선다. 나는 그런 나를 사랑한다. '샘물처럼 솟아나는 희망', 내 삶의 모토다. 하긴 그래야 산다.


살면서 또다시 '시'라는 것을 쓸 것 같지는 않다. 재주가 없다. 시는 아무나 쓰나? 그것도 시라고 썼냐고, 그런걸 보여주냐고 핀잔을 들을지도 모른다. 그럼 시라고 하지 않아도 좋다. 그냥 내 마음을 옮겨 적어본 것이라고 그리 고쳐 말할 것이다. '오불관언' (별상관없다, 새삼 무슨 큰 상관이 있겠나?)! 그런데 나는 나의 이 짧은 끄적거림이, 지난해 늦가을 아들 녀석을 만나고 돌아온 후의 어느 날 새벽 내 마음에 들어온 이 단상이 좋다. 많이 좋아한다. 그래서 용감하게 내가 귀하게 생각하는 여러분과 공유하는 것이다. 그리 이해하시라!


고독, 외로움 그리고 두려움, 이 세 가지는 비슷한 듯 다르고 다른 듯 그렇게 함께 한다. 고독이야 객관적 상태이니 그렇다 쳐도 내가 주관적으로 느끼는 마음의 공허함인 외로움은 만만히 볼 것이 아니다. 작심하고 겨루기 몇 판을 해야 한다. 내가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다. 어떤 때는 지고 어떤 때는 이긴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할 것은 그 외로움이 너무 오래, 상시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지속되게 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결국은 실기를 하게 되고 종국에는 심각한 상황을 맞게 된다.


내가 꼭 이겨내야 할 존재라는 인식이 그 시작이 되어야 한다. 단순히 고독해서 그런 것이고 과한 두려움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그리 생각해서는 안된다. 외로움의 원인은 정작 따로 있다. 그것들을 살펴봐야 한다. 그래야 솔루션의 가능성이라도 나온다. 다른 글에서 동남아 어느 도시에서, 신호등 없는 대로의 횡단보도에서 길을 건널 때에는 몇 가지 기술이 필요하다고 나는 말했다. 그 중의 하나가 길을 다 건널 때까지 끝까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달려오는 자동차며 대형 버스며 그 많은 모터바이크들을 눈 똑바로 뜨고 싸울 듯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안전하다, 그러면 내가 상황을 지배하게 된다.


외로움과의 싸움에서도 마찬가지다. 직시하자, 피하지 말자. 인정하고 일단은 수용하자, 단 한시적으로! 지금은 달리 방법이 없으니 그저 마지못해서. 그리고는 힘을 다해 거기서 벗어날 방법을 찾자, 찾아보자. 혹시 아나? 궁즉통이라고, 궁하면 통한다 했으니 내가 간절하게 찾으면 어느 날 해결책이 내 눈앞에 떡하니 나타날지? 나는 오늘도 그런 생각으로 나의 외로움과 마주한다. "어이, 임자, 해봤어?" 그 왕회장님의 이런 호통에도 나는 "네, 해봤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포기 않고 해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답할 것이다. 적어도 날아오는 재털이 맞을 일은 없을 것이다.


외로움 혹은 두려움

- 가을에 내리는 눈

지금 내게로 와서 나를 안아주세요,

낯선 여인이 유혹하듯, 깜짝 놀랄 만큼 선정적인 모습으로,

내가 당신의 향내 나는 젖가슴을 느낄 수 있게 그렇게!

불현듯 당신에 대한 그리움이 나를 덮쳐옵니다 이 새벽 사무치도록 그렇게!


언젠가는 내게로 와서 나의 이 두려움을 걷어가 주세요,

안개가 물러가듯, 비가 그치고 다시 해가 나듯,

내 얼굴에서 다시 빛을 볼 수 있도록 그렇게!

오늘따라 유난히 내가 알고 있는 그 두려움이 나를 짓누르네요 마치 처음 보는 남처럼 그렇게!


# 제 아들 녀석 말고는, 오늘 브런치 플랫폼에서 저의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저의 인생 첫 '시'를 읽으시는 첫 독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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