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전히 젊음, 그것이 인생. 스테판 말라르메 '바다의 미풍'
남자 나이 사십이 되면 이제 '드디어'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학교 다닐 때 그리 배웠다. 더구나 그건 공자님 말씀에 기초한 것이니! 그런데 그때에도 이상한 것은 있었다. '아니 남자 나이 40이면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가장 왕성한 나이인데 그때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유혹을 거뜬히 이겨낸다고? 에이 공자님이나 되니까 그럴 수 있었겠지. 우리네 평범한 사람들이야!'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런데 그 후 다른 책을 읽다가 공자님의 '사십 불혹'이 그런 의미가 아닌 다른 뜻으로 해석되어야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어로 된 책이었는데 '내가 나이 사십이 되었을 때 그때부터 나는 더 이상의 미혹이나 미망, 공허한 생각에 빠지지 않게 되었다 - I had no delusion.' 그런 의미였다. 그후 나는 공자님의 그 말씀을 늘 이렇게 새기고 있다. 어찌 본격적으로 내게 밀어닥치는 유혹에 쉽게 넘어가지 않을 수 있겠나? 그것보다는 나 자신 이제는 젊은 날의 그 숱한 공상과 망상, 미망에서 벗어나는 보다 현실적인 삶을 살게 되었다, 그리 보는 것이 좋겠다.
그것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여름날의 바람이든 유혹이든, 우리는 흔들린다. 어쩌면 자연스러운 반응일지도 모른다. 흔들림이 꼭 부정적인 의미를 가질 필요는 없다. 흔들려서 섞이고 새로운 깨달음도 얻고, 그렇게 분연히 일어나 새로운 길을 가기도 하고. 다만 현실도 함께 보는 눈만 유지하고 있으면 된다. 현실과의 괴리, 그 동떨어짐이 너무 심하고 크면 곤란하다. 그렇지만 않다면 오히려 가끔의 살짝 흔들림은 장려할 자극제가 아닐까?
젊었을 때의 너무 심한 흔들림도 문제지만 거꾸로 나이 들어서의 요지부동 또한 문제다. 도대체 변화가 없다. 그러니 그 어떤 발전이나 진화 또한 기대할 수 없다. 나이 들어서는 삼국지를 읽지 말라고 하지만 나는 나이 들면 꼭 삼국지를 다시 한 번 읽기를 권한다. 가라앉은 자신, 그 어떤 의욕이나 꿈도 새삼 갖지 않는 작금의 자기에게 그들의 영웅담을 보며, 그들의 그 용기와 결단력을 보면서 어떤 힘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과 응원 때문이다.
이제 시를 본다. 프랑스 상징주의 시의 거두 스테판 말라르메. 역시 명불허전, 이름은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 전해 내려 오는 것이 아니다. 나를 일주일 이상이나 붙잡고 있었던 그 시. 불어를 모르는 나로서는 제대로 멋지게 번역된 영문 번역본을 찾아내는 데에도 여러 날이 걸렸다. 드디어 찾았다! 내가 찾은 것이 아니라 내가 간절하게 찾고 있음을 알고 내게 와 준 것이리라. 영국의 유명한 시인, 그는 특히 불어시 번역에 능했고 프랑스 상징주의 시 분야의 대가였다. 나는 신이 났다. 열심히 번역했다. 내 마음에도 들었다. 그러니 이렇게 여러분들에게 소개할 수 있다.
이 시는 그의 시집 '목신의 오후'에 실려있는 64편의 시 중 하나다. 목신은 목축의 신 '판 (pan)'으로 반인반수, 게으르고 놀라운 성적 욕구를 지닌 존재다. 보는 눈은 있었던지 요정 시링크스를 마음에 품고 그녀를 뒤쫒다가 그녀가 갈대로 변하자 이 갈대를 꺾어 피리를 만들었다. 이것이 팬플룻 (pan flute)이다. 화가 앙리 마티스가 직접 그린 (그는 오직 '목신의 오후'를 위해 60점에 달하는 많은 에칭화를 제작했다.) 에칭화 29점을 토대로, 마티스가 직접 고른 말라르메의 시로 구성된 마티스 에디션은 시도 읽고 대가의 우아하게 에로틱한 에칭화도 보는 즐거움을 준다. 1932년 당시 145부만 출판되었다고 한다. 마치 백석시인의 처음이자 마지막 시집 '사슴'을 1936년 시인 본인의 돈으로 100부 한정판으로 찍어낸 것과 비슷하다. 이미 이 시집은 국내에서 아주 비싼 값에 거래되는 귀한 수집품이 되었다. 앙리 마티스 에디션의 거래 가격은 아마도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그 시집에 실려있는 시 '목신의 오후'는 길고 난해해서 나는 아직도 정복을 하지 못한 상태다. 드뷔시가 이 시를 보고 작곡한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은 13분 정도 되는 짧은 곡이다. 드뷔시는 무려 2년에 거쳐 이 곡을 완성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몽환적인 느낌, 드뷔시의 대표곡 중 하나로 꼽히는 이유다. 정작 전주곡 (서곡, prelude 혹은 overture)만 있고 본곡은 없다. 이 또한 재미있는 일이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 (Brise marine/Sea-wind)
-스테판 말라르메
아아, 이제는 나의 육체까지도 슬픔을 느낀다, 그런 단계에 왔다, 내 주위의 모든 책들 또한 다 읽혀졌다,
어디론가 훌쩍 날아가버리는 것, 그저 그렇게 떠나가는 것, 그것만이 남았다!
새들은 무언가에 끌린 듯 미친듯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포말의 마루 위를 지나가려고,
그리고 결국에는 저 높은 하늘 끝에 닿으려 기를 쓰고 있음을 나는 느낀다!
그 무엇도, 거울처럼 내 두 눈에 비치는 오래된 나의 정원들도,
또 그저 쓸쓸한 빛으로 빈 종이 위에 그림자만을 드리우는 내 탁자 램프도,
종이의 백색만이 철없는 느긋함을 즐기고 있을 뿐,
또한 품 안에서 어린 자식을 달래고 있는 젊은 아내조차도
이미 저 바다의 물에 한껏 잠긴 이 마음에서 그 큰 기쁨을 억누르지는 못하리니,
그 황홀함을, 오 수많았던 나의 밤이여!
나는 떠나리라!
오 증기선이여, 배를 붙들어맨 밧줄과 둥근 통나무를 제어하고 있는 기선이여,
저 멀리 어딘가에 있을 이국적인 땅을 향해 어서 닻을 끌어올려라!
그동안 이미 여러 번 잔인한 희망에 지친 그 피로함, 그 권태는 그럼에도 여전히 손수건을 흔들며 보내올
마지막 작별인사의 유혹에 집착하고 있구나!
그런데 그렇다고 앞으로의 항해에서 이런 일들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말라,
돛대들은 수많은 폭풍우를 불러올 것이고 잠을 깨우는 사나운 바람은 지금껏 많은 배들을
난파시킨 그 바다에서 여전히 지배자 노릇을 할 것이다.
결국에는 길을 잃고 돛 하나도 남지 않고 단 하나의 돛도 없이 그렇게,
그렇다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꽃들이 만개한 작은 섬이 있는 것도 아닐 것이고!
그러나 그럼에도, 오 나의 마음이여, 그대는 듣는구나, 여전히 듣고 있구나,
선원들이 부르는 출항의 노래를!
<우리말 번역 - 가을에 내리는 눈, 아서 윌리엄 시먼즈의 영어 번역본을 바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