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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남미로 지은 냄비밥, 웬만한 국산쌀보다 맛있어요

- 다르게 보기, '우주와의 화해'. 정일근 '냄비밥을 하면서'

by 가을에 내리는 눈

정작 실물은 보지도 못한 사람이, 그곳에 가보지 않은 사람이 오히려 더 큰 목소리로 그 물건과 그 장소에 대해 열을 올린다. 허풍도 이런 허풍이 없다. 그런데 본인은 그것을 허풍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 뭘까? 종교적 믿음도 아닐 것이고?


어쩌다 경험한 단 한 번의 경험이 앞으로의 모든 판단의 확고부동한 근거가 된다. 쉽게 바뀌지도 않는다. 편견의 무서움이다. 처음 경험의 순간이 중요한 이유다. 새끼오리는 알에서 깨어나 처음 눈에 들어온 존재를 자신의 어미라고 생각한다지 않는가? 이를 '각인 (imprinting)'이라고 부르는 전문용어까지 있는 것을 보면 그냥 하는 말은 아닌 것이다. 태어난 직후 민감한 그 특정 기간 ('민감기')에 각인의 대상이 확정된다. 그 뒤에는 다른 그 어떤 존재에게도 다시 각인되지 않는다. 사실 좀 무서운 얘기다.


해외에 살면서 3년 이상을 밥을 지어먹지 않았던 내가 밥을 해 먹는다. 장에 뜻하지 않은 탈이 나서, 그래도 소화가 잘 되고 위와 장에 별다른 무리가 없다는 밥을 짓는 것이다. 여기서 구할 수 있는 쌀은 안남미. 이곳에도 찹쌀 (sticky rice)은 있다. 안남미는 풀풀 날린다는 그 고정 관념에 따라 찹쌀도 조금 산다. 밥솥이 따로 없으니 허름한 냄비에 밥을 한다. 이제는 대단히 중요한 하루 중 일과로 자리 잡았다. 하루에 한 번 밥을 한다.


아니, 이런 밥 맛이? 이거 분명 안남미인데? 찹쌀을 조금 섞기는 했지만? 무슨 쌀 무슨 쌀, 한국의 유명 쌀로 압력밥솥에 지은 밥만큼 맛있는데? 몇 가지 이유는 있을 것이다.


우선 안남미임에도 우리가 보통 동남아의 식당에서 먹는 그런 품질의 쌀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킬로에 500원짜리 쌀도 있고 천원짜리도 있고 1,500원짜리도 있다. 제일 좋은 쌀을 샀다. 물론 안남미다. 제일 좋은 안남미 기준으로도 우리나라 좋은 쌀의 1/4 수준 가격이다.


나의 시간과 노력, 눈물 나는 정성이 가득 들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20분 정도를 내내 인덕션 불 옆에 서서 눌어붙지 않게 젓고 물도 중간에 보충하고 불의 세기도 조절하고, 최선을 다한다. 내 하루 먹을 밥이니까! 물을 훨씬 많이 먹는다. 그러니까 우리가 현지 식당에서 먹는 풀풀 날리는 밥은, 첫째, 쌀의 품질의 문제이고 (무려 세 배의 차이) 다른 하나는 물을 그들의 기준에 맞게 적게 부었기 때문이다.


충분히 물을 먹고 제대로 뜸이 든 안남미 밥은 우리 쌀만큼이나 기름지고 통통하게 밥알이 살아나있다. 식감 또한 아주 좋다. 나도 바로 얼마 전까지도 식당에서 날리는 안남미 밥을 먹었지만 같은 쌀로 지은 밥이 맞나 싶을 만큼 확연히 다른 밥맛이다.


쭉 뻗은 몸매의 빼빼 마르고 길쭉한 쌀이, 밥을 지어놓으니 살도 오르고 윤기가 잘잘 흐르고 그야말로 괄목상대. 미인도 이런 미인이 없다. 나의 장도 노여움을 풀고 이제 자리를 잡아간다. 이 안남미 밥의 힘이라 그리 믿는다. 고마운 마음을 갖는다. 찰기가 없다는 이 쌀이 사실은 그 결합력은 무서울 만큼 강하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오늘 지을 밥을 위한 쌀을 냄비에 덜어내 놓으면, 찹쌀도 조금 섞고, 그들끼리 찰싹 달라붙는다. 아직은 물을 부은 것도 아니다. 씻기 위해 물을 조금 부으면 마치 단단한 덩어리처럼 그렇게 변한다. 사실은 그 모양과 손에 느껴지는 감촉이 조금은 징그럽기까지 하다. 우리 쌀은 이런 느낌이 없다. 아마도 동글동글한 우리 쌀의 모양이 적당한 거리를 확보해 주기 때문일 것이다. 안남미는 길쭉 균일하기 때문에 공간이 생길 여지가 없다. 그러니 쫙 달라붙는 것이다, 물 없이도.


'안남'은 예전에 중국이 베트남을 부를 때 쓰던 말이다. '평안한 남쪽' 뭐 그런 뜻이리라. 지금은 베트남 중부를 가리키는 지리적 명칭으로 사용된다. 안남미, 그러니까 '인디카' 쌀은 베트남, 인도, 태국 등에서 재배되고 소비되는 쌀 품종이다. 세계 쌀 생산의 90%를 차지한다. 나머지 10%는 우리나라와 일본, 중국 북부지역에서 재배되는 '자포니카' 품종이다. 사람들의 인식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인디카 쌀로 지은 밥은 도대체가 풀풀 날리고 찰기가 없어서 맛이 없다고 생각한다. 반면 인디카 쌀을 주로 먹는 사람들은 거꾸로 자포니카 쌀로 지은 밥은 입안에 달라붙고 무거운 느낌이 들고 그래서 그 식감이 불편하고, 소화 또한 힘들다고 말한다. 습관과 그에 따른 익숙함, 그리고 그런 상황과 환경에 적응한 우리들의 몸과 마음의 산물이다.


그래서 오늘 하려는 얘기는? 편견의 위험성/처음의 경험이 우리 모두에게 주는 강력한 기억/그러나 좀 더 들여다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또 다른 가능성의 존재 인정하기/결국은 다 자기 하기 나름/어느 사회에나, 하다못해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사회 속에도 계층은 존재한다/그것을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계층은 다름을 의미한다, 일상 속의 상시적인 다름/다르게 보려 노력하면 그래도 조금은 달리 보인다, 그리고 그 효용 또한 존재한다/쉽게 우습게 보지 않으려 노력하기, 안남미 그리 우스운 존재 아니었듯이...


이렇게 오래 살면서도 냄비밥을 해보는 것은 처음이다. 궁즉통, 궁하면 통하기 마련이다. 어쩌면 그렇게 새로운 세계, 또 다른 가능성의 존재를 알게 하기 위해 일부러 궁하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궤변일까? '내가 처한 상황을 바꿀 수 있는 힘이 내게 없다면, 그 상황을 바라보는 나의 인식이라도 바꿀 수 있게 도와주소서!' 내가 근자에 늘 하는 기원이다. 효과가 있다. 다르게 보려 애쓰면 다르게 보인다. 내게 보이는 것이 결국 내가 맞이하는 상황이고 현실이 된다.


시를 본다. 냄비밥의 처음부터 끝을 친절하게 설명하는 시다. 시인이 이 시에서 말하는 대로 그대로만 따라 하면 어떤 쌀을 가지고도 참으로 맛있는 밥을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나저나 무슨 사연으로 이 시인은 나처럼 냄비밥을 짓나? '우주와의 화해'라는 구절이 나를 기쁘게 한다.


무릇 모든 형태의 화해는 좋은 것이다. 나는 여전히 그리 믿는다. 예수가 중재한 인간과 여호와 하나님의 화해, 도덕성에 얽매이지 않은 '정치 현실주의'로 어쨌거나 수많은 화해를 성사시킨 헨리 키신저. "미국에게는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 오직 국익만이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말을 아주 중요한 내 삶의 덕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저 보기 나름, 상황의 산물, 혹은 내 필요와 나의 절실함의 정도가 그 잣대가 될 뿐!


아날로그 밥맛의 추억을 소환하는 시의 마지막 부분도 좋다. 아련한 옛 추억의 기억들,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을 자신만의 '화양년화'. 꽃같이 아름답고 화려했던 그 시절! 냄비밥, 안남미 냄비밥, 충분히 맛있다! 만만히 볼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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