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고 싶었지만 말할 수 없어서 그저 없는 걸로 치고 살았는데.
가장 좋아하는 한국 작가가 누구냐는 질문에 이제는 흔쾌히 대답할 수 있다. 나는 최은영을 가장 좋아한다. 겨우 두 권의 소설집을 읽었을 뿐이지만, 단 두 권의 책만으로 나에게 확신을 준 작가는 그가 처음이다.
그의 소설을 읽으며 나는 내 안을 더욱 깊이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공간은 어떤 바깥세상 보다 넓었다. 들어갈 땐 두렵고 떨리지만 막상 들어가면 내가 오랫동안 찾던 곳임을 알게 된다. 편안해서도 아니고, 이상적이어서는 더욱 아니다. 이런 장소가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지만 말할 수 없어서 그저 없는 걸로 치고 살았는데, 너무나 선명하고 정확하게 그 공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서 오는 반가움 때문이다. 그래서 읽는 내내 울면서도 그 눈물에는 기쁨도 조금 섞여 있었다.
가장 좋았던 작품은 '이모에게'이지만 소설집의 제목이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로 정해진 것에 대해서는 한 치의 불만도 없다. 이해할 수 없어서 감당할 수 없는 생을 사는 동안, 아주 희미하지만 분명 존재하는 어떤 빛이 있다는 걸 알면,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
P. 31
그녀는 어떤 사안에 대한 자기 입장이 없다는 건, 그것이 자기 일이 아니라고 고백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건 그저 무관심일 뿐이고, 더 나쁘게 말해서 기득권에 대한 능동적인 순종일 뿐이라고, 글쓰기는 의심하지 않는 순응주의와는 반대되는 행위라고 말했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중)
P. 70
그때 당신과 희영의 뒤쪽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범죄는 모국에서! 그러자 누군가 조금 작은 소리로 따라 외쳤다. 강간은 미국에서!
당신과 희영은 서로의 얼굴을 봤다. 몇몇이 그 구호를 산발적으로 외치는 동안 당신은 몸을 돌려 누군지 모를 사람들에게 말했다. 구호 중단하세요. 구호 중단하세요. 그러나 당신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마치 한국어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한국어로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당신은 인파 속에서 허우적대면서 말했다. 구호 중단하세요. ('몫' 중)
P. 150
있는 일을 없는 일로 두는 것. 모른 척하는 것.
그게 우리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을 대하는 우리의 오래된 습관이었던 거야. 그건 서로가 서로에게 결정적으로 힘이 되어줄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방식이기도 했지. 그렇게 자기 자신을 속이는 거야. 다 괜찮다고, 별일 아니라고, 들쑤셔봤자 문제만 더 커질 뿐이라고. ('답신' 중)
P. 302
"땡큐."
그러자 여자가 기남을 꼭 껴안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나머지 여자 둘도 기남을 한 번씩 꼭 껴안아줬다. 누군가와 이렇게 포옹을 한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진경이나 우경이 어릴 때 안아본 게 기남이 해본 포옹의 전부였으니까. 이름도 모르는 여자들과 포옹하면서 기남은 예상치 못한 따뜻함을 느꼈다. 그 포옹이 얼마나 좋았는지 기남은 자신만의 비밀로 간직하기로 마음먹었다.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