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에 공지 메일이 왔고 파트장님이 나에게 참석하라고 지시했다. 참석은 가능했지만 부서의 대표로서 회의 안건에 대해 의견을 제시할 자신은 없었다. 주말 내내 이 생각이 떠나지 않고 검은색 물감이 한 방울 섞여 톤다운 되듯이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깔깔거리며 웃는 와중에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월요병을 착실히 키워나갔다. 그래서 오늘의 출근책은 히가시노 게이고를 골랐다. 월요병엔 재밌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책을 읽는 게 최고니까.
정해진 시간이 되어 떨리는 마음으로 전화 회의에 입장했다. 회의 주최자는 우리 부서에서 나만 참석한 거냐며 파트장님도 참석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 사람이 보기에도 전배 온 지 한 달도 채 안 된 신참이 현안 이슈에 대해 그럴듯한 의견 제시를 해줄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귀찮아하던 파트장님도 결국 함께 참석을 했다.
최근에 읽은 《내 일로 건너가는 법》에서는 회의에서 '발언'하는 것이 곧 그 사람의 '영토'를 상징한다고 했다.
회의실 안에서 한 사람의 말은 한 사람의 영토가 된다. 일견 각자의 위치에 따라 영토가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이기 쉽다. 한가운데 앉은 사람이 가장 큰 영토, 그 옆에 앉은 사람이 그다음 크기, 그렇게 나눠가지다 나는 손바닥만 한 땅덩이에 위태롭게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회의실 안 영토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물론 고정되어 있는 수많은 회의실이 있다는 것을 안다. 이 경우에는 '회의실'이 아니라 '명령실'이라고 이름을 바꿔 부르는 게 어떨까?). 회의 시간은 말로 자신의 영토를 한 뼘씩 늘려 나가는 시간이다. 총도 칼도 없다 자료와 생각과 의견, 이것을 재료로 삼아서 말을 해야만 한다. 언제부터? 지금부터. 시키는 일만 고분고분 잘해도 괜찮은 시간은 의외로 짧고, 어느 순간 사람들이 당신의 입을 바라보는 시기가 찾아온다. 자신이 말을 해야 하는 시간이 왔을 때 아무런 준비 없이 무작정 뛰어들 순 없다. 연습이 필요하다. 한 번도 안 넘어진 김연아를 상상할 수 있는가? 넘어지는 것도 자주 해봐야 선수가 된다.
내 일로 건너가는 법, 김민철, 위즈덤하우스, 2022, P. 113
나는 전화 회의지만 '회의실에서 말은 곧 영토'라는 말을 떠올리며 진지하게 듣고 있다가 우리 부서의 의견이 필요한 타이밍에 내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말'을 했다. 그리고 회의가 끝날 때도 '감사합니다'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래 봤자 오늘의 전화회의에서 나의 존재감은 매우 희미했다. 나는 그저 다른 사람들의 말을 받아 적으며 내용을 따라잡느라 급급했다. 그렇지만 기죽지 않고 말해야 할 땐 말을 하려고 했다. 오늘은 그 정도까지라도 해낸 나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다. 이런 태도로 차차 영토를 늘려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예리하지만 친절한 말로 나의 의견을 전달할 수 있겠지. 그때까지 잘 버텨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