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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을 땐 걷기만, 먹을 땐 먹기만

몇 날, 몇 해를 잊고 살았어도 새 날처럼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by 오공부

언젠가 아이들이 우리 집 가훈 알아오기 숙제를 받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한 적이 있다. 여러 가지 후보가 있었지만 결국 내 맘대로 정한 우리 집 가훈은 '걸을 땐 걷기만, 먹을 땐 먹기만'이다.



이 말만큼 과거나 미래에 빠지지 않고 충실하게 지금을 살 수 있게 해주는 말도 없는 듯하다. 걸을 땐 그야말로 걷기에만 주의를 기울이고, 먹을 땐 그야말로 먹는데만 신경을 쓴다면 우리 삶은 훨씬 단순하고 평온해질 것이다. 이게 잘 된다면 버스를 탈 때,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때, 매 순간 호흡할 때 우리는 그 대상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



우리가 컨트롤할 수 없는 타인의 시선과 평가. 이미 벌어졌거나,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생각으로 우리는 현재를 낭비하고 있다. 또는 그러한 생각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과도한 음식을 먹거나, 유튜브를 보거나, 술을 마신다. 뭘 하는지도 모르게 시간은 흘러가고 몸과 마음은 지쳐버린다.



빠르게 지나간 시간 앞에서 우리는 그제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 뭘 좋아하는지, 어떤 상처가 있고 내면에 어떤 힘을 지니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살아왔음을 후회한다. 스스로에 대해 알기를 필사적으로 거부하고 회피하는 데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썼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다시 도망친다.



하지만 모든 것을 인정하고 직시하는 순간부터 괴로움은 사라진다. 허송세월했다고 안타까워했던 날들조차도 실은 오늘을 위해 꼭 거쳐야 할 시간이었음을 저절로 알게 된다. 그러므로 늦은 때란 없다.



몇 날, 몇 달, 몇 해를 잊고 살았어도 새 날처럼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언제나 기억하고 싶은 말이다. 그나저나 요새는 우리 집 가훈 알아오기 숙제는 안 내주는지도...?

여름엔 봉숭아 물들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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