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Madame Byun
Nov 09. 2021
“엄마, 조선시대 사람이야?”
내가 허락해 주지 않는 어떤 일에 아이가 발끈하며 반기를 들 때 주로 하는 말이다.
예를 들어 어두컴컴한 시각 동네 편의점에 친구를 만나러 나간다고 할 때, 자정이 넘어서까지 잘 생각 않고 폰을 붙들고 있을 때.
특히, 그 상대가 남자아이일 경우에 이러한 대치상황이 종종 발생하곤 한다.
취미가 단체생활, 특기가 '단체의 장'인 아이는 어릴 때부터 성별 구분 없이 친구가 많았다.
초등 때는 남자아이들과 어울려 축구도 하고, 몇몇 남자아이들은 집으로 놀러 오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코찔찔이 초딩이 아니지 않나.
엄연히 남녀 구분이 있는 15세의 청소년이 낮도 아닌 야심한 시각 남사친과 단 둘이 편의점 접선을 한다는 건, 유교걸인 나로서는 쉬이 납득이 어렵다.
쉽게 오케이 할 수 없는 사안이지만, 아이도 호락호락 물러서지 않는다.
“왜 안된다는 건데?”
사실 내가 이 문제에 당황스러운 건 질문에 대한 뾰족한 해답이 나에게 없다는 것이다.
왜 이 시간은 안 돼? 왜 남사친은 안 돼? 잠깐 나가는 게 왜 안 돼?
왜, 왜, 왜? 납득 가능한 이유를 제시하라는 끊임없는 요구에 대한 대답은 늘 궁색하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확 마!’라고 입을 막아버리고
싶지만 그러기엔 무리수가 따르는 중2다.
"너무 늦은 시간은 밤길이 위험하니까."
구태의연하지만 상식 수준의 답을 말한다.
나의 대답에 아이는 역시 지지 않고 따진다.
“9시, 10시면 엄마도 산책 나가는 시간이고 학원 끝나는 시간도 대부분 9시가 넘는데 뭐가 늦다는 거야?”
맞는 말이므로 나는 또 할 말이 없다. 궁색한 이유 2가 이어진다.
“나랑 너랑 같니? 넌 아직 보호자의 관리가 필요한 청소년이고 남자 친구는 낮에 만나. 환한 대낮 놔두고 왜 하필 밤 시간이야?”
바로 그때 조선시대 레퍼토리가 등장한다.
“엄마 조선시대 사람이야?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여자 친구는 되고 남자 친구는 안된다는 논리는 뭐야?
성차별이야? 걔네들도 똑같은 친군데 뭐가 달라?”
나름대로 요래조래 방어를 하다가 이 대목에서 주로 나는 막히고 만다.
할 말이 없다.
그렇다고 내가 내심 불안한 이유를 툭 까놓고 밝힐 수도 없다.
a. 이성을 잃기 쉬운 어두컴컴함과 달빛이 공존하는 시간이므로
b. 분위기에 휩쓸려 덥석 손이라도 잡고 뽀뽀라도 할까 봐
c. 늦은 시각 동네에서의 만남은 불필요한 소문을 야기하므로
d. 한 번 허락하면 계속 그럴 것이므로
a~d의 상황이 일어날 가능성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세상에는 혹시나 하는 일이 생각보다 자주 일어난다.
그리고 나는, 혹시나 하는 모든 상황에서 딸을 보호해야 하는 엄마다.
이런 이유를 댄다면 딸은 펄쩍 뛰며 조선시대 녀자를 넘어 나를 과대망상증 환자로 취급할 것이 틀림없다.
더욱이, 나는 하해와 같은 이해심을 가진 중2 엄마를 지향 중이기에,
‘조선시대 사람’이라는 대목에서 나의 이상향 VS 유교걸 DNA를 보유한 실제 정체성 사이의 혼란이 찾아온다.
나는 조선의 부녀자다
몇 번의 줄다리기 끝에 결국 아이는 굴복하고 다음 날 늦지 않은 시각에 만나는 것으로 합의를 본다.
아직은 힘이 더 강한 내가 이 줄다리기에서 이기고 있지만 언제까지 내 뜻대로만 할 수 없다는 걸 안다.
아이가 커갈수록 이런 일들은 많아지고 자신의 생각을 점점 더 강하게 주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 엄마들이 종종 활용하는 휴대폰 차단과 위치추적 등의 방법을 동원해 아이를 전방위 마크한다 해도
빈 구석은 생긴다.
무엇보다, 엄마의 ‘안 돼!’라는 말은, 그들에게 얼마나 하고 싶게 만드는 반작용의 에너지를 생성하는지.
엄마 몰래 ‘이러저러하고 저러 이러한 일’들을 심심찮게 해 봤던 그 시절 우리들은 잘 안다.
딸은 나와의 합의대로 다음 날 8시쯤 친구를 만나고 돌아왔다. 편의점에서 먹고 남은 젤리와 초콜릿 등을
동생에게 선심 쓰듯 던져주고, ‘뭐 했어?’라고 눈빛으로 묻는 나를 애써 못 본 척하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행히 입가에 묻은 라면 국물의 흔적으로 보아 별 일은 없어 보였지만.
밤과 남사친이 존재하는 한, 조선시대 레퍼토리를 둘러싼 우리의 힘 겨루기는 계속될 것이다.
사진출처 픽사 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