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물었다. “내일 오전에 휴가 낼 수 있어?” 순간 무슨 일인가 싶었다. 요즘 바쁘게 다니는 아내다. 이번엔 또 어디를 가려는 걸까 싶어 되물었다. “좀 늦게 출근해도 되고, 휴가 낼 수도 있지. 무슨 일인데?” 아내는 아이들 참관수업이 내일인데, 시간이 겹쳐서 둘 다 갈 수가 없다고 했다. 초등학교 5학년 아들과 2학년 딸이 같은 학교에 다니지만, 수업은 다르다. 결국 나는 아들 반에, 아내는 딸 반에 가기로 했다.
저녁 식사 후, 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딸, 아빠가 내일 참관수업 갈까?” 대답은 없었다. 대신 딸은 조용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건 분명한 거절이었다. 순간 웃음이 나왔지만 마음 어딘가가 쿡 하고 찔렸다. “왜? 아빠가 가면 안 돼? 아빠 창피해?” 다시 묻자, 이번엔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인다. 말보다 더 정직한 대답이었다. 웃긴데 좀 아팠다.
아내와 나는 웃으며 물었다. “왜 아빠가 창피한데? 혹시... 늙어서?” 딸은 말없이 있다가 조용히 말했다. “못생겨서.” 그 말에 또 한 번 웃음이 터졌지만, 동시에 어떤 감정이 뭉근하게 남았다. 나는 말했다. “딸, 너 아빠 많이 닮았는데 그런 말 하면 어떡해.” 그 순간,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슬며시 무언가가 움직였다.
그날 밤, 아내가 말했다. “딸이랑 교감이 부족해서 그럴 수도 있어.” 나는 나름 딸과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퇴근하면 간식도 챙겨주고, 놀아주고, 종종 대화도 한다. 하지만 그런 건 내가 정한 방식이었고, 딸의 마음에 닿는 시간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엄마와 함께한 시간이 많으니 딸이 엄마를 더 좋아하는 건 당연한 일인데, 나는 그 ‘당연함’에 안주하며 더 깊이 다가갈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
아이들은 사랑을 말로 표현하지 않는다. 눈빛으로, 몸짓으로, 작은 행동으로 표현한다. 나는 그 언어를 잠시 잊고 있었던 것 같다.
다음 참관수업에는 딸이 조용히 “아빠, 이번엔 아빠가 와줘”라고 말해줄 수 있도록, 그 말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 하루하루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빠라는 이름 아래 멀찍이 서 있기보다, 딸의 세계 안으로 한 발짝 더 들어가는 노력. 서툴러도, 못생겨도, 늙었다고 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아이가 되길 바라는 대신, 먼저 그렇게 괜찮은 아빠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