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글을 쓰다
어릴 적 아버지께선 휴지 한 장도 아껴쓰라 하셨고, 허투루 켜져 있는 전등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내 눈엔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근검절약이었지만 그 당시 아버지들은 다 그러셨을 것이다. 아버지는 지나간 달력을 조심스럽게 뜯어내 몇 번을 접어 과일칼로 쓱쓱 잘라내 유용한 메모지로 만들어 쓰시곤 했다. 번듯한 메모지가 따로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빳빳한 달력 메모지는 늘 아버지 곁에서 당신의 기억을 도왔다. 누구의 전화번호, 내일 할 일, 장보기 목록들이 아버지의 굵은 손마디처럼 힘있는 필체로 쓰여졌다.
어릴 적부터 보아온 이런 모습 덕분인지 나도 메모를 즐겨한다. '메모'를 하지 않으면 도무지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다. 마치 절대 잊어서는 안될 것을 적지 않으면 금세라도 잊을 것 같은 두려움에 지금도 난 메모장을 찾는다. 메모는 소박한 나만의 글쓰기이다. 아버지 세대와 다른 것이 있다면, 투박한 달력 메모지가 아닌, 포스트잇에서 시작해 지금은 스마트폰 메모장을 즐겨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쓰고자 하는 내용과 욕구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무언가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모아서 보고 싶은 욕구가 더 강해진 요즘은 '에버노트' 같은 스마트워킹 프로그램에까지 관심을 넓혀 사용하고 있다. (사용법 책을 구매해 새로 산 카메라의 신기술을 메뉴얼 보면서 공부하듯, 3번을 정독했다. 기회가 된다면 나의 '소박한 스마트워킹 노하우'를 공유하고 싶기도 하다.) 매혹적인 문장을 만나고 싶다.
아나운서로 청주MBC에 입사해 17년째(2016년 10월부터는 MBC충북)가 됐다. 지금은 방송국에서 하는 정말 다양한 업무를 맡고 있다.(라디오 시사프로그램_임규호의 특급작전 제작, 라디오 편성업무, 각종 기획업무, 최근엔 뉴미디어 콘텐츠와 관련해 기획중이고, 2017중국인유학생페스티벌 PM으로 참여하고 있다) '글'을 '음성'으로 표현해야 하는 직종의 특성상, 입에 착착 잘 붙고, 굳이 외우려 하지 않아도 머리 속에 쏙쏙 이야기의 연결고리들이 이어지는 글을 만날 때 내심 흥분을 감출 수 없다. 그런 글은 참으로 '귀한' 글이다. 이때 글은 자연스레 '감흥'으로 전달된다.
방송이라는 업종은 전문화된 다양한 분업체계로 탄탄하게 짜여 져 있다. 각 파트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기본으로 깔려 있어야 하고, 이를 흔드는 사람은 인정 받기가 그만큼 어렵다. 그 튼튼한 구조 속에서 글은 기획을 표현하는 가장 '구체적인 행위'이면서 든든한 '허리'이다. 그래서 더 '좋은 글'을 만나고 싶고, 나아가 더 '쉬운 글'을 쓰고 싶은 욕구는 쉼없이 분출된다. 하루의 끝은 글쓰기
세상에 쉬운 일은 없겠지만, 내게 글쓰기는 '커피로스팅'보다 복잡하고, '수제 맥주 담그기'보다 더 오래 걸리는 난해한 작업이다. 시중에 '글쓰기' 관련 책들을 몇 권 사서 읽어봤다. 한결같이 '쉬운 글쓰기'가 '좋은 글쓰기'라고 말하고 있다. 말이 쉽지 '쉬운 글쓰기'가 제일 어려운 일임을 써본 사람은 모두 공감할 것이다.
최근 모바일콘텐츠와 관련된 고민들을 하고 있다. 무거운 지상파 콘텐츠가 도달 하기 어려운 영역에 관심을 갖고, 우리 콘텐츠의 다른 유통통로로써 관심 받고 있는 SNS를 고민하면서 들여다 보고 있다. 짧은 호흡, 쉬운 전개, 파격, 재미, 감동의 메시지로 대중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콘텐츠를 보면, '광고카피'같은 매력적인 텍스트(글/문장)가 모바일콘텐츠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직접 모바일 콘텐츠를 제작해 보면, 좋은 글 한 문장이 정말 아쉬울 때가 많다.)
이렇게 '어렵고', '중요한' 글쓰기는 써버릇해야 잘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문장이 되고 영상과 음성, 자막이 더해지는 과정을 매일 같이 경험하는 필자는 기획의 '허리'에 해당하는 글쓰기가 늘 부담스럽고 고통스럽다. 그래서 오늘도 밤마다 무엇이든 끄적여본다.(요즘은 좌판을 두드린다)Homoscribens(글쓰는 인간)
2017년 한해를 시작하던 즈음 가슴에 머무는 표현 하나를 찾았다. 호모스크리벤스Homoscribens:글쓰는 인간(카카오톡과 페이스북의 프로필사진 아래 자리하기도 했다). 인간은 쉽게 잊어버린다. 쓰지 않으면 기억은 금세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기회가 되면 하루를 무언가 쓰지 않고 기억에만 의존해 살아보는 실험을 해보고 글을 써봐야 겠다.) 기록된 정보는 공유가 쉬워지고, 의미를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
그래서, 글을 써보기로 했다. 그런데 짧은 글쓰기가 왠지 더 어렵다. 그러고 보면 자세하고 길게 늘여 쓴 글은 오히려 읽기에 불편하다. 맥락을 이해하기도 더 어렵다. 여러 문단을 하나로 줄이고, 한 문장으로 갈무리한다는 것은, 분명 긴 사유의 과정을 거쳐 비로소 깔끔하고 쉬운 문장으로 나오는 이치와 닿아 있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을 보면 부럽다. 타고나는듯도 싶고, 빛나는 문장에 질투심 느끼기도 한다. 만약 필자처럼 스스로 글쓰기에 재능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많이 쓰고, 줄여 쓰고, 고쳐 쓰고, 다듬어 쓰는 수 밖에 없다. 탐스럽고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 자료를 모으고 분류하고 쓰기좋게 정리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중요하다. 쓸 거리가 빈약할 때 장황하고 심심한 글이 나온다.
지금 주위를 둘러보고 손에 잡히는 책(혹은 잡지, 신문도 좋다)의 본론 첫 문장을 살펴보라. 글쓰는 이에게 첫문장은 가장 어려운 숙제 중 하나이다. 잘 빠진 첫문장으로부터 일사천리 스토리텔링이 시작된다. 첫문장을 완성했다면 그 다음 글쓰기는 좀더 수월해 진다. 그만큼 첫문장은 모든 글의 시작이고, 모든 생각의 첫 표현이다. 여러분은 오늘의 첫문장을 어떻게 쓰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