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자생존

적는 자 만이 살아남는다

by 꿈꾸는오월

“오늘, 두 번째 시간까지는 워밍업입니다.”


7시 정각. 땡치자 마자 시작된 스피드 글짓기 트레이닝. 숨 돌릴 새도 없이 주제가 주어졌다.


주어진 주제를 놓고 5분의 짧은 시간 동안 글을 짓고, 서로 공유하는 시간.

제시어는 그때그때 주어진다. 딱 주어진 시간 내, 1분 내외로 생각해서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은 굉장한 집중력을 필요로 했다. 단순한 글쓰기가 아닌, 민첩성도 있어야 하는 훈련. 한 번에 탁 떠올라 글을 써 내려간 것이 있는 반면, 반대로 한 번 막히기 시작하면 그대로 시간이 통째로 날아갔다. 5분이 마치 30초 같았다.


백만분의 1초로 금은동이 정해지는 올림픽 경기처럼, 모두들 1초, 1분에 집중해서 글을 써 내려갔다. 적막한 가운데 울리는 타자 소리만이 남았다.


우리는 출발과 초록, 그리고 여름에 관한 글을 썼다.

글을 나누어 읽는 시간은 언제나 흥미롭다. 세 단어 모두 평범해 보였지만, 각자의 경험과 시건에 따라 다양하게 확장되었다. 한 가지 주제에 대해 다른 이야기들, 그리고 전개 방식과 발상들.

출발이 누군가에겐 여행의 첫 장면이고, 누군가에겐 인생의 2막이었다.


글을 쓰되, 제시어를 쓰지 않고 글을 써보는 훈련도 했다. 꽤나 신선함과 동시에 어렵기도 했다.

마치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세요,라고 하면 코끼리만 생각나는 것처럼.


주제를 대하는 방식은 다채로웠다. 누군가는 시를 썼고, 누군가는 편지글 형식으로 글을 써 내려갔다. 하나의 주제, ‘여름’과 같은 계절성 단어를 가지고도 이렇게나 다양한, 같은 생각 하나 없는 이 시간이 참 즐거웠다.



모든 주제에 대해, 어쩔 수 없이 가장 먼저 나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내가 겪은 일들, 내가 해온 생각들, 그런 상황에 대한 묘사.

그게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마치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처럼, 나 혼자 상상적 청중을 가지고 있나 싶을 정도로. 너무 내 이야기만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질문이 고개들 무렵, 한 사람이 손을 들고 물었다.


“글을 쓰려 생각하면, 자꾸 제 경험만 떠오르는데, 이런 건 어떻게 극복해야 하나요?”


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있다니. 그 질문이 어찌나 반갑고 위로가 되던지.

질문에 대한 선생님의 대답이 궁금해졌다. 내 이야기로만 모든 것을 써 내려갈 수 없다는 것을, 지난 시간 ‘와인’이라는 주제를 받고 느낀 것이었으니까. (알코올쓰레기인 나는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 내가 모르는 것은 쓸 수 없다는 것.


“좋은 질문이에요, 저도 에세이를 쓰지만, 쓰다 보면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다는 생각을 하기도 해요.”


갑자기 안도의 한숨이 나오면서,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다 같은 마음이구나 싶어서.

“그러니까 경험들이 중요하겠죠. 그리고 기록이 중요해요. 어떤 일이나 사건, 혹은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것들도 그때 내 기분이 어땠는지, 상황이나 풍경에 대한 묘사들 같은. 기록을 계속하다 보면 이야기할 거리가 다시 생기더라고요.”


적자생존, 적는 사람이 살아남는다는 우스갯소리가 떠올랐다. 알면서도 기록하지 못한 그동안 나의 하루들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모든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생각하다가, 신이 주신 망각이란 축복도 떠올렸다. 그래, 이제 기록해야지. 다시 마음먹었다.


글을 잘 쓰는 사람들도, 많이 쓰는 사람도 같은 고민을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리고 결국 '적는 사람', 기록하는 사람이 진리라는 것도 다시금 깨달았다.


그리고 우리는 5개 정도의 간단한 주제를 각자 종이에 쓰고, 제비 뽑기를 해서 또 글을 썼다. 내가 생각지도 못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가장 좋은 것은 열 사람의 각기 다른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각자 나이도, 직업도, 성격도 취향도 다른 사람들이 모여 ‘공동출판’이라는 단 하나의 교집합만으로 모인 것 같은 느낌.


그렇게 쓴 글에 대한 이야기, 주제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두 번째 시간도, 우리는 엄청난 집중력과 좋은 대화들로 시간을 채웠다.


집으로 가는 길, 노트를 한 권 샀다.

왠지 나도 적(는) 자가 되어 살아남아야 같이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