붙잡는 게 ’어리석음‘ 즉 무명이다.

by 황금지기


마음의 때가 벗겨지는 그 힘겨운 시간을 견디고 버텨야만 비로소 주가의 위치, 즉 '때'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 터널을 지나며 성급함은 무뎌지고, 눈을 가렸던 희망의 안개가 걷히면 내면에는 평안이 찾아온다. 그때 서야 너무 애쓰지 않고, 무리하지 않으며, 아는 것보다 적게 말하며 여백과 간격을 유지하는 호흡을 배우게 된다.


나를 벗 삼아 목표를 향해 정진하는 ‘오우아(吾友我)’의 단계를 지나, 나와 투쟁하며 자신에 대응하는 ‘오대아(吾對我)’의 단계를 거치면, 마침내 집착하던 나를 장례 치르는 ‘오상아(吾喪我)’의 경지에 이른다. 파동은 그 본질에 따라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할 뿐이다. 변하는 것을 변하지 않을 것이라 착각하고 붙잡는 것이 바로 어리석음인 무명(無明)이다. 나를 비워낸 자만이, 흐르는 파동의 결을 따라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다.


성급함이라는 때를 벗겨내면 주가의 때(위치)가 보인다. 주가의 '때'를 보지 못하는 이유는 성급함이라는 때가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반드시 이익을 내야 한다"라는 고집, "예측이 맞아야 한다"라는 아집을 장례 치른 마음에 시장의 순리인 등락의 리듬이 찾아올 것이다.




“인간이 돈 때문에 저지르는 실수 중 90%는 잘못된 타이밍과 선택으로 인해 일어난다네. 사람에게는 각자 자신이 다룰 수 있는 돈의 크기가 있거든. 돈을 다루는 능력은 많이 다루는 경험을 통해서만 키울 수 있어. 처음에는 작게, 그리고 점점 크게.”

<이즈미 마사토, 부자의 그릇>


인간은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크기의 돈을 가질 때 반드시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실수를 저지르고도 시장 상황이나 운, 혹은 남의 탓으로 돌리는 이들은 결국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며 파멸의 길을 걷는다. 돈을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의 크기는 오직 경험을 통해서만 확장된다.


처음에는 작게 시작하여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조금씩 키워나가야 한다. 자신의 그릇보다 넘치는 돈을 탐하면, 톱니바퀴는 어긋나기 시작한다. 한 번 어긋난 톱니바퀴가 불러오는 파멸은 순식간이며, 그 궤멸적인 순간을 맞이하고서야 자신의 크기를 몰랐던 오만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된다.


돈을 쫓는 경험은 자신의 그릇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얼마를 벌 것인가'에 집착하지만, 정작 집착해야 하는 것은 "당신의 그릇이 돈을 감당할 수 있는가?"일 것이다. 작은 돈을 핸들링하며 경험이 쌓여야만 그다음 크기의 돈이 담아갈 수 있다.




대부분 투자자는 흐름을 보고 있으나, 이면을 지각하지는 못한다. 중요한 본질은 눈에 보이지 않으며, 눈에 들어오는 가격의 움직임은 대개 껍질에 불과하다. 치명적인 시각적 약점을 극복하고 핵심을 꿰뚫는 마음의 눈을 뜨기 위해서는, 포기하지 않는 반복과 처절한 복기를 하루하루 쌓아 올려야 한다.


시간이 더해지고 경험이 깊어질수록 파동에 관한 위대한 조언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추세는 강하고, 조정은 약하다”라는 것이다. 추세를 거스르는 반대 매매는 그 힘이 약한 조정을 먹으려는 시도이기에 수익이 잘 나지 않을뿐더러, 작은 흔들림에도 심리가 무너지기 쉬워 짧고 불안한 대응에 그치기 일쑤다. 기다릴 수만 있다면, 파동의 거대한 흐름인 추세에 몸을 맡기고 유리한 방향으로만 나아가는 것이 심리적으로나 수익적으로나 훨씬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는 길이다.


가격은 껍질이고 추세가 본질이다. 가격의 움직임이란 껍질이 아니라 흐름이라는 본질을 보아야 한다. 마음의 눈이 본질을 꿰뚫을 때, 투자는 불안한 도박이 아닌 여유로운 항해가 된다.




파동이 본래 등락하는 것이라면, 기꺼이 '역행자'가 되어야 한다. 파동이 우상향할 때 매도점을 찾고, 우하향할 때 매수점을 찾아야 한다. 이처럼 오르락내리락하는 파동의 리듬에 몸을 맡기는 '등락 군자'에게 파동은 그저 반복되는 유희일 뿐이다.


파동의 패턴은 한동안 지속되는 특성이 있다. 만약 이어지는 패턴이 뾰족하고 거칠다면 챙기면서 나아가야 한다. 또한, 원칙으로 정한 기준선을 위아래로 무의미하게 넘나든다면 그것은 최대 난코스인 '횡보'의 신호이므로 잠시 흘려보내는 것이 현명하다. 파동은 에너지의 수렴과 발산이기에 '시세 직후'와 '에너지가 응축된' 상태를 구분할 줄 안다면 투자의 '때'를 알게 된다. 파동은 늘 반대로 붙이면서 흔들기에 흔들리지 않는 원칙이 필요하다. 삶을 즐기는 것이 그저 살아가는 것이듯, 시장에서는 생각의 사슬을 끊고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자만이 최후의 승자가 된다.


생각이 멈추는 지점에서 흐름이 시작된다. 투자는 복잡한 고차 방정식을 푸는 것이 아니라, 수렴과 발산이라는 에너지의 호흡에 맞춰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일이다.




주가가 어디로 갈지는 전혀 알 수 없어도, 현재 어느 위치에 와 있는지를 알려고 노력하는 것—최소한 지금이 시세 분출 직후인지, 아니면 에너지를 응축한 상태인지 파악하는 것—이 투자 본질에 대한 이해다. 추세 흐름대로 나아갈 것이라는 확률적 믿음은 곧 시계추처럼 왕복하는 '주기(Cycle)'에 대한 신뢰에서 나온다. 투자자의 최선은 무모하게 정답을 맞히거나 온갖 노력으로 예측하는 데 있지 않다. 주가의 위치(때)'를 알고, 중심을 잡은 채 그저 오르락내리락하는 파동을 반복하는 것뿐이다.


이 주기를 이해할 때, 고점 매수와 저점 매도라는 치명적인 위험의 실체를 보게 된다. 가격의 등락 속에서 대응의 여지를 발견하게 되며, '싼 가격에 사는 것'보다 '비싼 가격에 파는 것'에 집중함으로써 손실이 나면 즉시 잘라내는 결단력을 얻게 된다. 추격하지 않고, 보낼 수 있게 되며, 파동에 자신의 호흡을 맞추는 이 역발상이야말로 도달해야 할 투자 지성이다.


주가의 위치를 아는 만큼 투자하는 마음은 여유롭다. 어디로 갈지 맞히려는 자는 늘 미지의 공포와 불안에 떨지만, 현재의 위치를 아는 자는 어떤 풍랑 속에서도 평온하다. 시세가 뜨겁게 달아오른 직후라면 쉴 줄 알고, 차갑게 식어 에너지가 모인 상태라면 기회를 기다릴 것이다.




진정한 현명함은 좋은 것을 고르는 안목보다 나쁜 것을 피하는 냉철한 감각에 있다. 즉, 잃지 않는 능력이 우선이다. 주가의 위치를 파악하여 때에 따라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결단', 즉 애매한 흐름을 보내줄 줄 아는 능력이 실력의 요체다. 어디로 갈지 맞히려는 시도를 멈추고, 지금 이곳이 '해 볼 만한 자리인가'를 가늠하고 있다면 일취월장한 것이다. 결국 예측의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정한 자리에서만 기계적으로 등락하며 손실을 회피하는 것이 투자의 완성이다.


이 진리는 깨친 자들만이 눈빛으로 공유할 뿐, 지식으로 전수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현자는 아는 것보다 적게 말한다. 말을 많이 하는 것은 변화하며 흘러가는 것들을 억지로 붙잡으려고 애쓰는 흔적일 뿐이다. 상수는 말을 아낌으로써 내면에 여백을 남기고, 그 여백은 투자에서 기다림이라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승화된다.


애매함을 보내주는 결단이 실력의 정점이다. 투자에서 남겨둘 수 있는 최고의 여지는, 오직 기다림을 통해 싸게 사는 인내뿐이다. 나쁜 것을 걸러내고 버리면, 남는 것은 필연적으로 좋은 것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늘 ‘무엇을 더 해야 할지’를 고민하며 조급해하지만, 시장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를 끊임없이 자문해야 하는 곳이다. 침묵이 깊어질수록, 기회는 더욱 선명하고 눈부신 모습으로 드러날 것이다.




시장에서 “결대로 치라”는 말은 곧 유리한 방향으로 진입하라는 뜻이다. 원칙으로 정한 선의 각도가 살아 있을 때 비로소 공은 '세워 놓고 칠 수 있는' 스트라이크 존 안으로 들어온다. 추세 방향의 공은 안타 확률이 높은 속구와 같고, 그 반대 방향은 공략하기 까다로운 변화구다. 경험이 부족할수록 변화구에 대처하기 어려우므로, 노련한 타자가 되려면 먼저 나쁜 공을 골라내는 능력부터 키워야 한다.


원칙의 선이 누워있다면, 공은 안타가 되기 힘든 유인구다. 이때는 공을 치는 것보다 흘려보내는 능력이 훨씬 중요하다. 오랜 세월 각고의 노력 끝에 오직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오는 공만 치는 것이 바로 '이겨놓고 치는 것'이다. 애매하다면 스트라이크 존에 걸치는 변화구조차 골라내는 인내심만으로도 충분하다. 개인투자자는 타석에 서서 기다릴 수 있는 체력만 있으면 삼진 아웃을 당하지 않는 절대적 우위에 서 있다. 다만 욕심에서 비롯된 성급함과 부질없는 희망으로 장점을 살리지 못할 뿐이다.


투자는 원하는 공을 무한정 기다릴 수 있는 특권의 게임이다. '원하는 공이 올 때까지 무한정 기다려도 된다'라는 규칙이 해 볼 만한 이유다. 휘두르지 않아도 패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온전히 믿을 때, 시장이라는 투수를 완벽하게 압도하게 된다.




그리스인 조르바가 그러했듯, 우리 각자의 인생이라는 춤판에서 자신만의 ‘절대 율동’을 찾아 절대적 신뢰를 보내며 한바탕 놀아보는 것이 삶의 본질이었다. 투자라는 춤판도 마찬가지였다. 파동이 그저 등락하는 그 무심한 율동에 따라, 원칙으로 정한 선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따라가는 것—그것이 바로 성급함과 헛된 희망이라는 극복했다는 증거였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세상에서, 그 리듬에 맞춰 최선을 다해 놀았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행복할 자격이 있었다.


투자자를 무너뜨리는 근원은 게으름이며, 대부분 실패는 이기심과 게으름이 결합한 '지적 게으름'에서 비롯된다. 시장의 흐름에 온몸을 맡기지 못한 채 요행을 바라는 마음, 공부하지 않고 수익만 탐하는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그저 걸으면서, 그저 행하면서 이 지적 게으름을 극복해야 한다. 단지 묵묵히 걷는 꾸준함이 시간 게임을 버텨낼 수 있는 탄탄한 건강과 밑천이 된다. 투자자는 뇌동매매의 뿌리인 지적 게으름을 끊어내고, 오르락내리락을 춤사위로 받아들이며 쉼 없이 정진해야 한다.


시장은 등락의 리듬이 쌓여 이루어지는 거대한 춤판이다. 파동이 만들어 내는 곡선에 자신의 원칙을 맞추며 춤추는 것이 투자다. "왜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지"라고 묻는 것은 지적 게으름일 뿐이다. 그저 시장이 보여주는 율동을 신뢰로 답하면 족할 것이다.




파동은 단순히 고점이 낮아지거나 저점이 높아지며 쉬운 파동을 나오는 Failure를 기본으로 한다. 하지만 고점을 높이는 척, 혹은 지지선을 이탈한 척하며 붙여놓은 채 반대 방향으로 거칠게 쏘아 올리는 '트랩(Trap)'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딱 맞아떨어지는 정답만을 배워온 인간, 그리고 확신을 통해 안정을 찾으려는 생존본능을 지닌 인간에게 이 변화무쌍한 파동은 무한히 어려울 수밖에 없는 영역이다.


부를 확장하는 단계에서는 지식의 넓이가 중요할지 모르나, 부를 일구기 시작하는 지점에서는 선택과 집중 즉 깊이가 핵심이다. 외부의 소음에 귀 막고 돈과 심리에 관한 자신만의 독백을 통해 내면을 향해 깊게 파고들어야 한다. 사람의 컨디션이 에너지의 상태에 따라 수시로 변하듯, 시장 또한 에너지의 양과 질에 따라 등락한다.


시장은 확신을 탐하는 인간의 본능을 공략한다. 변동성이라는 거친 파도를 견디게 하는 것은 원칙이라는 무거운 ‘닻’이다. 버텨낼 때, 부는 비로소 내면에 뿌리를 내린다. 지식을 넓히느라 에너지를 분산시키지 말고, 원칙 하나를 갈고 닦아 깊이를 더하는 길이 빠를 것이다.




투자는 인내하며 기회를 엿보는 기다림의 미학이지만, 몇 시간을 기다려 진입했더라도 상황이 변하면 단 몇 분 만에 막연한 기대를 내려놓고 빠져나와야 하는 대응의 예술이다. 진입 전에는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으며 원칙이 아닌 모든 변화를 무시해야 하지만, 일단 진입한 후에는 흐르는 물처럼 변화에 온몸을 맡겨야 한다. 이 심리적 충돌 상태를 견디며 진입과 청산을 이어가는 것, 그것이 바로 원칙의 반복이다.


중요한 기준선 근처에서 시세가 지루하게 머물며 힘들게 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곳이 결정적인 자리를 만들기 위해 에너지를 응축하고 있다는 속삭임이다. 파동은 항상 대중의 심리와 반대로 움직이며, 수렴의 끝자락에서 시세를 터뜨린다. 첫 번째 시세는 달콤하게 주어지지만, 그 이후의 흐름은 결코 쉽게 주지 않는 것이 에너지 발산과 수렴의 원리다.


지루한 횡보와 수렴으로 기회는 숙성된다. 지루한 흐름은 도약하기 위해 발판을 다지는 것이다. 투자자는 바위의 단단함과 토끼의 영리함이라는 양극단의 감각을 동시에 품고, 이 모순의 춤판에서 기계적으로 율동해야 한다. 바위처럼 기다리고 토끼처럼 빠져나오는 이 모순의 반복이 성공 공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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