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는 기대치가 없기에 기계적이다.

by 황금지기


행복의 본질은 거창한 성공에 있지 않다. 그저 오늘 하루를 꼭꼭 씹어 먹고, 잘 싸는 그것이 거의 전부다. 투자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기술적 분석이 성공으로 귀결되는 유일한 길은 기계적인 반복뿐이다. 기계는 감정이 없기에 기대치도 없다. 그저 입력된 대로 행할 뿐이다.


투자자를 가로막는 지적 게으름은 결국 '이기심'과 '게으름'의 합이다. 이를 극복하려면 몸으로는 그저 걷고(Just Walk), 손으로는 그저 행해야(Just Do It) 한다. 또한 그저 만나는 사람에게 잘해 주고,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은 그저 두는 마음으로 이기심을 덜어내야 한다. 기대치를 버린 마음이야말로 시장이 원하는 천성이다. 투자 성공이 바로 이 천성에 노력을 곱한 것이다. 그리고 행복은 결과에서 기대치를 뺀 값이고, 돈은 추세에서 심리(기대치)를 뺀 것이다. 성공과 행복을 거머쥐고 싶은가? 그렇다면 그저 기대치를 버린 채, 웃고 감사하며 묵묵히 걸어가라. 복은 그 비워진 자리로 자연스레 찾아온다.


기계는 기대치가 없기에 기계적이다. 흔들림의 주된 원인은 기대치가 원칙과 시장 사이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행복의 공식처럼, 매매에서 욕심(기대치)을 빼면 남게 되는 것은 기계적인 대응과 평온한 수익이다.



“희망의 불씨는 꺼지지 않는다.” 다만 그 빛을 알아채지 못할 뿐이다. 화가 바뀌어 복이 되는 전화위복은 인생의 질서다. 누구나 그런 마음을 먹을 수는 있지만, 현실의 무게에 눌려 실행에 옮기지 못할 뿐이다. 인생 또한 하나의 거대한 에너지이자 파동이기에, 끊임없이 등락하며 변한다. 현자는 고난이 훗날의 복을 불러들이는 것을 알지만, 범인은 그 이치를 알 길이 없다.


실패의 늪에 빠지더라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반전의 전환점이 만들어지는 것이 인생이다. ‘위기(危機)’는 위태로움과 기회의 양면이다. 위태로움을 뒤집어 바라보는 혜안을 가질 때 기회는 모습을 드러내고, 반대로 기회에서 방심할 때 위태로움은 다가온다. 이것이 세상의 피할 수 없는 이치다. 그러므로 일희일비할 것이 아니라,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길게 보아야 한다. 인생도, 파동도 그저 무심하게 등락할 뿐이기 때문이다.


등락은 위기와 기회의 반복이다. 시장에서는 무너뜨리러 온 재앙인지 아니면 더 큰 수익을 주려는 전환점인지는 오직 태도가 결정한다. 천천히, 또박또박 길을 걸어간다면. 등락의 파동은 결국 더 높은 곳으로 데려다줄 것이다.




모든 사람의 마음은 갈대처럼 변하고, 생로병사의 굴레 속에서 그 누구도 원하는 대로만 살 수는 없기에 인생은 근본적으로 고단하다. 톨스토이가 말했듯,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한 모습이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의 구구절절한 이유가 있다. 행복은 수많은 조건이 맞물려야 하지만, 그중 단 하나라도 어긋나면 순식간에 불행으로 떨어진다. 행복해지기는 너무나 어렵고 불행해지기는 너무나 쉬운 것이 인생이다.


거기에다 인간은 만족을 모르는 본능을 지녔기에, 곁에 있는 소중한 일상이나 사소한 기쁨을 놓치며 힘들어한다. 그러므로 만나는 이들에게 따뜻하게 대하는 것은 세상 이치를 깨달은 자가 마땅히 행해야 할 인간의 도리다. 성공이란 '천성'과 '노력'의 곱셈으로 이루어진다. 만약 타고난 성품이 부족하다면 후천적으로라도, 의식적으로라도 이타적인 심성을 갖추려 노력해야 한다.


좋은 사람이 되는 공부는 좋은 투자자가 되기 위한 기초 공사다. 감정을 내려놓지 못한 천성은 곱해지는 노력을 무색하게 한다. 오늘 만난 사람들에게 건넨 작은 친절이나 흐름 따라 내려놓은 절제는 훗날 투자를 완성할 강력한 천성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찰리 멍거는 “행복한 삶의 첫 번째 규칙은 기대치를 낮추는 것”이라 단언했다. 비현실적인 기대치는 필연적으로 비참한 삶으로 연결된다. 기대치를 합리적으로 잡고, 삶에서 일어나는 결과를 어느 정도의 냉정함으로 수용해야 한다. 비현실적인 기대치가 고통을 불러오는 이유는 명확하다. 첫째, 세상은 본래 연약하고 변덕스러우며 복잡한 곳이기에 실망을 피하는 유일한 길은 오히려 실망을 예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진보란 늘 만족의 골대를 옮겨놓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세상을 즐기는 유일한 비결은 세상이 변하는 속도보다 기대치를 더 낮추는 것이다.


흔히 “높은 위험이 큰 수익을 준다”라고 말하지만, 진정한 의미는 따로 있다. 그것은 “높은 위험은 대부분 기간 낮은 이익을 얻게 될 것이지만, 아주 드문 확률로 그간의 모든 낮은 수익을 상쇄하고도 남을 높은 성과를 낼 가능성이 있다”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이 게임에서 살아남는 핵심은 기대치를 낮추고 자잘한 손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럴 때만이 그동안의 손실을 전부 만회하고도 남을 만큼 시장에서 오래 버틸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낮은 기대치는 투자자를 보호하는 여유로운 마음의 단단한 갑옷이다. 시장은 실망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오만한 자에게 결코 승리의 열매를 허락하지 않는다. 기대치를 낮추면 손실은 가벼워지고, 기다리는 시간은 수월할 것이다.




에너지는 쉼 없이 수렴과 발산을 반복한다. 이 ‘때’를 아는 자는 자신을 겨누던 성급함의 칼날을 비로소 무디게 할 수 있다. 달이 차면 기울고 기울면 다시 차오르듯, 파동 또한 자연의 이치를 따른다는 것을 깨달을 때 헛된 희망의 달뜸에서 벗어난다. 바로 그 순간, 그는 알을 깨고 나와 진정한 투자자로서의 역사를 시작하게 된다.


알에서 깨어난 자만이 하워드 막스가 강조한 네 가지 핵심—가격과 위험, 주기와 역발상의 본질에 닿는다. 고점 매수와 저점 매도는 대응의 여지가 극히 적기에 치명적으로 위험하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수렴과 발산이라는 에너지의 주기, 즉 '주가의 위치'를 읽어내게 된다. 그리하여 원칙의 선이 우상향할 때는 모두가 취할 때 매도점을 찾고, 우하향의 끝자락에서는 매수점을 찾아 초기 진입하는 역발상을 실천한다. 세상사 때가 있으며, 진정 두려워해야 할 사실은 그 ‘때’를 알 수 있는 ‘때’가 한참 후에야 온다는 것이다.


때를 아는 자는 시장의 흐름에 순응한다. 흐르는 강물을 억지로 막지 않듯, 삶과 시장을 그저 흐르도록 두어라. 모든 비현실적인 기대치를 내려놓고 그저 ‘그냥(Just)’ 행하는 것—그 단순하고도 명료한 실천이야말로 삶과 투자를 관통하는 가장 위대한 지혜다.




“감각이란 경험의 축적으로부터 솟아 나오는 진실한 종합판단이다.” 고레카와 긴죠의 이 통찰은 투자자의 감각이 결코 차가운 머리의 계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뜨거운 시장에서 몸으로 직접 겪어낸 고통과 환희의 시간이 응축된 결과물임을 말해 준다. 투자의 성공에 이르는 유일하고도 정직한 공식은 거북이처럼 천천히, 그러나 쉬지 않고 자신만의 기계적인 진입과 청산을 반복하는 ‘행함’ 그 자체에 있다.


누구나 고점에서 팔고 저점에서 사고 싶어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지점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아야 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저점만 노리는 것은 대개 추세를 거스르는 역진입이 되어 ‘싸게 사는 것’에만 매몰된 하수들이 빠지는 대표적 편향이기 때문이다. 둘째, 운 좋게 고점이나 저점에서 잡았더라도 “좋은 자리에 잡았다”라는 자만심과 염원이 생겨, 정작 챙겨야 할 때 수익을 확정 짓지 못할 위험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과신 편향을 경계하며, 중심을 잡고 추세에 순응하며 정해진 자리에서 반복해야 한다.


인간은 행운은 과대평가하고 불행은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저 거북이처럼 묵묵히 오늘을 반복하라. 거북이처럼 느리지만 정직하게 원칙을 반복하는 자만이 예측의 늪을 건너 성공의 대지에 닿을 것이다.




기대치를 버리고 만나는 모든 이에게 선의를 베푸는 것은 방하독선(放下獨善), 즉 나만의 옳음을 내려놓고 겸손의 자리에 섰다는 증거다. 손실을 고정하여 제어하는 것은 봉위수기(逢危須棄), 즉 위기를 만나면 모름지기 버릴 줄 아는 돈에 대한 숭고한 윤리 의식이 생겼다는 의미다. 작은 손실은 기꺼이 내어주고 큰 이익을 길게 취해가는 사소취대(捨小取大)의 경지, 이것이 비로소 실력이 쌓였다는 확신이다.


적은 손실은 이 게임을 지속하기 위한 최소한의 비용이다. 최대 목적은 오직 '이 판에 끝까지 살아남는 것'이어야 하기에, 다음 카드를 확인하고 유리한 상황을 선별하기 위한 필연적 손실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시장의 끝없는 조롱과 흔들림은 지불해야 할 수수료와 같다. 도태되지 않고 일관되게 원칙을 지켜내기 위한 비용인 셈이다. 적은 손실을 허용하지 않고서는 결코 반복의 축제를 즐길 수 없다.


마음고생은 반드시 이수해야 할 필수 교양 과목이다. 지금 겪는 그 씁쓸하고도 고독한 고통이야말로, 달콤하고 묵직한 수익의 정당한 대가이기 때문이다. 손실은 생존을 위한 필연적 비용이며, 마음고생은 수익을 위한 정당한 대가다.




커티스 페이스는 투자의 성패를 가르는 치명적인 네 가지 감정으로 희망, 걱정, 탐욕, 절망을 꼽았다. "매수했으니 오를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 손실을 인정하지 못한 채 자리를 지키는 걱정, 더 큰 돈을 탐하며 비중을 무리하게 늘리는 탐욕, 그리고 시스템을 의심하며 자포자기하는 절망. 이 네 가지 감정의 굴레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투자자는 그저 시장의 소음 속에서 허송세월할 뿐이다.


맞고 틀림의 결과에 이 감정들을 쏟아붓는 것은 실로 부질없는 짓이다. 내면이 이 진실을 깨우칠 때 투자의 출발선에 서게 된다. 시장이라는 게임판은 누구도 알 수 없으며, 영원한 정답 또한 존재하지 않는 순수한 확률의 세계다. "맞았을 때 이익을 어떻게 길게 가져갈 것인가?"와 "틀렸을 때 손실을 어떻게 짧게 끊어낼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야 이 게임판에 오랫동안 머물 수 있을 것인가?"라는 생존을 고민하는 것이다.


확률의 세계에서 감정은 명백한 소음이다.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춤을 추는 매매는 결국 파멸로 이어진다. 게임판을 떠나지 않고 원칙을 지키는 한, 확률의 여신은 반드시 복리의 마법을 선물할 것입니다.




대한민국 5,000만 인구의 얼굴을 1초에 한 명씩만 보아도 꼬박 1.5년이 걸린다. 세상 속에서 지금 내 곁에 닿은 인연들이 얼마나 경이롭고 소중한가! 이 깊은 이치를 깨닫고 나면 세상사에 너무 애쓸 것도, 무리하게 붙잡거나 기대할 것도 없음을 알게 된다.


투자 또한 이 순리를 따른다. 뇌동과 추격이라는 인간의 거친 ‘본성’이 때가 되어 떨어져 나가야만, 관점이 자리를 잡고 중심이 바로 선다. 올 것이 정확히 오고 갈 것이 반드시 가듯, 때가 차면 우리를 괴롭히던 나쁜 습관들도 자연히 사라지게 된다. 괴로운 이유는 감당하지도 못할 그릇에 넘치는 것을 담으려 하고, 억지로 맞추고 붙잡으려 무리하며 순리를 거스르기 때문이다.


투자의 순리를 알면 집착할 일이 없다. 힘듦의 본질은 결국 억지를 부리며 끝내 놓지 않으려는 집착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비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순리의 강물에 몸을 맡길수록, 내면이라는 그릇은 커지기 마련이다.



첫째, 진정한 감각은 무심(無心)에서 발현된다. 그것은 ‘아아미후’—즉 아쉽고, 아깝고, 미련 남고, 후회되는—인간적 감정의 소용돌이를 뒤로하고, 시장의 본질적인 불확실성과 변동성에 단단한 굳은살을 만드는 인고의 과정이다. 의심과 공포, 좌뇌가 속삭이는 지껄임을 버텨내며 축적된 경험이 내공이 될 때, 물방울이 바위를 뚫듯 반복과 복기로 흐름을 꿰뚫게 된다. 그때 비로소 아무런 사사로운 생각도 섞이지 않은 '진실한 종합판단'의 상태, 즉 감각이 깨어난다.


둘째, 감각은 시장의 습성을 내 안에 동기화하는 것이다. 달이 완전히 차야 기울고, 완전히 기울어야 다시 차오르듯 시장의 에너지 또한 임계점에 도달해야 변한다. 성급한 희망의 달을 마음에 띄우지 않고, 대중의 심리와 반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시장의 생리를 이해하는 것이다. “훌륭한 의사는 독수리의 눈과 사자의 마음과 여자의 손을 가져야 한다”라는 영국 속담처럼, 복기를 통해 대세를 읽는 '독수리의 눈', 1억이나 ‘1억 1천이나!’ 과감하게 던질 줄 아는 '사자의 가슴', 그리고 진입과 청산, 손절을 기계적으로 수행하는 섬세한 '숙녀의 손'이 하나로 합쳐질 때 비로소 완성된 감각이라 부를 수 있다.


셋째, 감각은 바람과 깃발, 그리고 내가 하나가 되는 핸들링(Handling)의 예술이다. 불어오는 바람(시장)과 그에 반응하는 깃발(파동), 그리고 그 움직임에 맞춰 유연하게 노를 젓는 나(투자자) 사이의 부조화가 사라지는 삼위일체의 조화—그것이 바로 감각이 보여주는 최상의 실체다.


감각은 감정의 너머, 사유가 멈춘 곳에서 시작된다. 매매 후 밀려오는 아쉬움과 후회는 살아있다는 증거이자, 감각이 무르익고 있다는 숙성의 신호일 뿐이다. 감정들에 먹이를 주는 생각이 멈추어야 종합판단이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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