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이 흐리면 깃발은 보이지 않는다.

by 황금지기


시장에 부는 바람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불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방향이 언제 변할지도 알 길은 없다. 이 불확실성을 대전제로 삼고, 오직 자신만의 깃발(원칙)을 세워야 한다. 깃발 아래 부는 바람과 흔들리는 시장 속에서 일희일비하지 않는 나라는 존재가 더해질 때 매매는 시작된다. 애매하고 어려우면 깃발을 내리고 수비에 치중하며, 기회가 선명할 때는 과감히 깃발을 높여 공격에 집중하는 이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투자의 거의 전부다.


그려지는 파동에서 바람 소리가 들리는가? 바람이 남으로 불면 파동은 우하향하고, 북으로 불면 우상향할 뿐이다. 원칙이 흐려져 안개가 끼면 깃발은 보이지 않고, 깃발이 보이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강한 바람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또한 명확한 원칙이 있더라도 그것을 지키는 나라는 주체가 무너진다면 깃발은 보이지 않게 되고, 부는 바람은 그저 소음으로 전락한다. 흔들림 없이 원칙을 지켰을 때, 바람과 깃발, 그리고 나는 삼위일체가 된다.


깃발은 원칙으로 정한 선이다. 바람에 맞춰 깃발이 어느 방향으로 흔들리는지를 읽어내고, 그 깃발을 믿고 몸을 맡기는 것은 오롯이 투자자의 몫이다. 원칙이라는 깃발을 세워두고도 탐욕과 두려움이라는 안개가 끼면 길을 잃을 것이다.




인간은 신이 아니기에 부분에 집착하면 전체를 보지 못한다. 작은 이익이나 손실에 매몰될수록 마음속 안개는 짙어지고, 큰 물줄기는 시야에서 사라진다. 이것이 인간이라는 그릇의 한계라면,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작은 것은 버리고 큰 것을 취하는 길을 걷지 않겠는가? 작은 파동에 일희일비하는 것은 도박이나 다름없으며, 큰 흐름을 읽어내고 그 몸통에 올라타는 것이 진정한 투자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보듯, 파동을 독수리의 눈으로 크게 조망하기 위해서는 객관적 시선으로 파동을 그려야 한다. 선을 긋고 파동을 그려낼 때 비로소 현재 주가의 위치가 가늠되고, 시장이라는 거대한 숲에서 헤매지 않을 지도를 갖게 된다. 여기에 원칙이라는 자신만의 깃발을 세우고, 그 깃발의 펄럭임에 모든 사사로운 생각을 맡길 수 있는 충분한 비움이 여유로움과 만날 때, 투자자는 준비가 된 것이다. 준비되지 않은 채로 이기겠다는 것이 성급함이며, 과도한 레버리지에 의존하는 것은 이미 지고 들어가는 게임이다.


주가의 위치는 투자자가 쥐고 있는 생존 지도다. 숲 전체를 보는 자가 길을 잃지 않는다. 직접 그려가는 파동은 감정의 안개를 걷어내는 가장 강력한 도구다. 현명한 투자자는 오직 원칙이라는 깃발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여유로운 발걸음을 옮길 뿐이다.




반대 매매는 실수의 여지가 크기에 경계해야 한다. 박스권으로 여기고 한 방에 넘어서지 못하고 멈칫거린다면, 일단 수익을 챙기고 재차 돌파하거나 붕괴할 때 다시 잡는 유연함이 필요하다. 아니면 애초에 보내주어야 한다. 이것이 항상 공존하는 위험과 실수의 여지를 최소화하는 길이다. 인생과 투자의 행운은 그저 오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위험과 실수를 줄여 나갈 때 그 자리를 채우는 무엇이다.


위험과 실수는 결국 욕심이 부른 업보다. 마음이 급하다는 것은 이미 심리가 무너졌다는 신호다. 진입하자마자 기가 막히게 반대로 역행하는가? 그것은 주가의 위치를 읽지 못한 채 눈앞의 잔파도에 매몰되었기 때문이다. 심리가 자꾸만 무너진다는 것은 곧 실력이 갖춰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겨놓고 쳐야 하는 이 냉혹한 시장에서, 무너진 심리로 이길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심리가 무너진 채로 매매하는 것은 돈을 쓰레기통에 처박는 것과 다르지 않다.


행운은 위험과 실수를 줄인 빈자리에 깃든다. 결국 수익의 크기는 심리의 깊이에 의해 결정된다. 주가의 위치를 모른 채 덤비는 성급함은 시장에게 당신의 패를 다 보여주는 것과 같다.




야구 타자가 공을 결대로 치기 위해 공을 세워 놓고 기다리듯, 배트에 전해지는 감각에 온몸을 맡기며 핸들링(Handling)하는 것—그것이 투자의 진정한 모습이다. 이것이 곧 '그냥 걷는 것'이며, 투자자가 오늘이라는 시간을 꼭꼭 씹어 먹으며 살아가는 방식이다. 초저녁 서쪽 하늘에 뜨는 초승달을 보며 그것이 차오르는 중인지 기울고 있는지를 아는 자에게, 초승달은 수렴을 끝내고 발산을 시작하는 '초기 진입점'으로 읽힌다. 그러나 모르는 자에게 그것은 그저 우연히 마주한 밤하늘의 달일 뿐이다.


이치를 깨친 자는 상현과 보름을 지나 하현과 그믐으로 이어지는 반복의 흐름을 안다. 초저녁 서쪽 하늘에 잠깐 머물다 사라지는 초승달에서 시세의 출발점을 보고, 해 뜨기 전 동쪽 하늘에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믐달에서 수렴의 끝자락을 본다. 시세 직후의 횡보와 조정이 에너지를 모아 결국 추세대로 흘러간다는 사실을 깨칠 때, 비로소 주가의 위치를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달은 차면 기울겠지만, 그 조정이 시간일지 가격일지, 혹은 길지 짧을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성급함과 헛된 희망은 조금씩 내려놓아진다.


달의 차고 기울듯 파동도 등락한다. 등락하는 애씀이 실력이 쌓이는 과정이자 인간으로서 성숙하는 길이다. 확률의 범주 안에 있음을 알면 너무 애쓰지 않고, 무리하지 않으며, 붙잡지 않게 된다.




음봉이 비처럼 쏟아질 것 같은 하락추세라면, 한 손에 우산을 쥐고 상황에 따라 ‘폈다 접었다’를 반복해야 한다. 반대로 화사한 햇살이 내리쬐는 상승추세라면, 여행 배낭을 곁에 두고 ‘맸다 내려놓았다’를 거듭해야 한다. 이것이 돈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 그것이 오늘이라는 축복을 누리는 마땅한 도리다.


투자자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시장보다는 기대치다. 기대치를 줄여야 편안하게 기회를 기다릴 수 있고, 기대치를 비워내야 단순하게 핸들링할 수 있다.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행복해지는 유일한 길은 끊임없이 머릿속으로 ‘기대치를 줄이겠다’라고 염불을 외우는 것이다. 다리로는 그저 걷고, 팔로는 그저 행하며, 가슴으로는 만나는 인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시장의 오르락내리락하는 파동 속에서 자연스럽게 반복할 수 있게 된다.


시장의 날씨에 맞춰 우산을 펴거나 배낭을 메는 단순함이 투자의 정수다. 많은 이들이 비 오는 하늘을 보면 햇살을 원하는 기대치의 감옥에 갇혀 괴로워한다. 기대치를 비운 공간이 수익이 고이게 될 그릇이 될 것이다.



우리는 종종 실패로 흐려진 선구안을 '특별한 기회에 대한 촉'이라 착각하곤 한다. 「불편한 편의점」의 민식에게 비트코인이 그러했듯,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탐욕은 만질 수 없는 허상의 돈이자, 도리어 내 소중한 자산을 집어삼키는 '돈을 먹는 하마'가 될 뿐이다. 계속된 실패는 직관을 다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눈을 멀게 할 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를 지탱하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인생은 본래 끝없는 문제 해결의 연속이다. 어차피 풀어야 할 숙제들이라면, 그나마 가치 있고 괜찮은 문제를 고르려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세상은 온통 자기 말만 내뱉는 잘난 척과 아는 척으로 가득 찬 중학교 교실 같다는 작가의 말은 입을 다물게 된다.


잦은 실패는 본질을 벗어났다는 경고다. 계속된 손실 중에 찾아오는 "이번엔 진짜다"라는 느낌은 감각이 아니라 독일 가능성이 크다. 모두가 아는 척 떠들 때, 깃발 아래 입을 다물고 묵묵히 걸어가야 한다.




“상대가 강할수록 머리를 쓰지 말고 동전을 던져라.” 시골 의사 박경철의 조언처럼, 시장이라는 거대한 힘 앞에 인간의 얄팍한 계산은 무모하기 그지없다. 상대가 강할수록 무심으로 대하며, 기계적으로 확률에 몸을 맡겨야 한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라 시장에서 느끼고 부딪치며 알아가야 할 동물적 감각의 영역이다. 동전을 던진다는 자체로 생각을 포기하고 확률을 선택한 것이다. 투자는 원칙이라는 깃발이 선명히 펄럭일 때까지 기다리다가, 그 펄럭임에 맞춰 주저 없이 동전을 던지는 확률 게임일 뿐이다.


초저녁 서쪽 하늘에 낮게 떠 있다 사라지는 초승달과 해 뜨기 직전 동쪽 하늘에 잠깐 비치는 그믐달처럼, 주가의 바닥과 천장, 그리고 초기 진입점도 잠깐 스쳐 지나간다. 경험과 내공으로 무장하여 주가의 위치를 통찰하는 감각이 갖춰지기 전에는 이 신호들은 결코 눈에 보이지 않는다. 달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차오르고 다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기우는 영원한 반복을 지속하듯, 파동 또한 그저 무심하게 형태만 달리할 뿐, 등락할 뿐이다.


등락의 마디에서 우리는 생각이 아닌 ‘돈’을 던져야 한다. 나를 지배하던 생각의 사슬을 끊어낼 때 투자의 길이 선명히 보인다. 높은 확률로 틀릴 수 있는 생각의 한계를 인정하고 시장의 확률에 돈을 맡기는 것이 투자다,




사람의 몸에서 외부로 통하는 구멍은 남자가 아홉, 여자가 열이다. 아홉 개의 구멍을 가진 남성은 과감하지만, 빈틈이 많아 구미호의 홀림에 빠지기 쉽고, 열 개의 구멍을 가진 여성은 한결 섬세하여 세이렌의 치명적인 유혹에도 강한 내성을 지닌다. 투자에서 대범함과 무모함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며, 바둑의 묘수와 악수가 한 끗 차이듯, 우리는 그 얕은 선의 경계에 서야 한다.


진정한 투자자는 남성의 과감함과 여성이 섬세함이 조화를 이룰 때 완성된다. 이는 소심함과 대범함 사이, 그리고 대범함과 무모함 사이의 아슬아슬한 칼날 위에 서야 함을 의미한다. 또한 신이 인간에게 보고 듣는 구멍 네 개를 주시고, 말하는 구멍은 단 한 개만 주신 뜻을 새겨야 한다. 밖으로 내뱉기보다 혀끝으로 삼키며 성장하라는 것, 그것이 바로 신의 섭리다.


과감하게 진입하되 섬세하게 다루는 것이 목적이다. 시장은 남성적인 정복욕을 부추겨 무모함으로 이끌거나, 과도한 소심함으로 기회를 놓치게 만든다. 과감하게 진입하되 섬세하게 다루는 그 조화가 '무모한 도박사'가 아닌 '위대한 투자자'로 만들어 줄 것이다.




기술적 분석으로 성공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오직 '기계적인 매매'뿐이다. 시장의 돈은 살아 움직이는 생명력을 가졌으되 인간과 같은 감정은 없으므로, 투자자 또한 감정을 배제한 채 기계적이어야 한다. 기계는 기대치가 없기 때문이다. 투자 행위를 중단 없이 지속하고 결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기대치를 덜어내야 한다. 결국 투자의 지속가능성은 기대치를 얼마나 비워내느냐에 달려 있다.


시장에서 마주하는 모든 고통과 어긋남은 내 마음을 온전히 다스리지 못한 나의 탓일 뿐이다. 우주의 모든 현상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스스로 존재하며, 쉼 없이 변하고 흘러갈 뿐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삶의 지혜란 흐르는 물에 몸을 맡기듯, 거대한 시장의 흐름에 나를 기꺼이 맞추어 가는 것이다.


기술적 분석의 완성은 기대치 없는 기계적 매매다. 기계적으로 행하되 물처럼 유연하다면, 대응은 비로소 예술의 경지에 닿는다. 기계적으로 한다는 것은 생각을 버리는 것이다. 기계는 "왜?"라고 묻지 않고, "만약에"라며 미련을 두지도 않는다. 그저 원칙이 가리키는 대로 행할 뿐이다.




수익이 나고 안 나고는 전적으로 시장의 몫이다. 그것은 행운과 우연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지는 '무의미의 축제'일 뿐이다. 반면, 손실을 확정 짓는 것, 잃지 않도록 지키는 것은 오롯이 자기 자신의 몫이다. 투자가 어렵고도 어려운 이유는, 끝날 때까지 위험과 실수의 여지가 공존하는 이 고단한 반복의 축제를 견뎌내야 하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수익과 손실은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 진정한 실력은 수익을 내는 기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위험을 감지하고 실수의 여지를 끊임없이 줄여 나가는 방어적 지혜에 있다. 이것이야말로 수많은 투자자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투자의 유일한 정답이다. 그리하여 누적 수익이 쌓일수록 투자자는 더 겸손해지고, 고개를 숙이며, 기대치를 내려놓게 된다. 그 끝에서 인간 본연의 자비로운 부처의 마음에 다가선다.


실수를 줄이는 데 집중할 때 수익은 필연적으로 따라온다. 수익은 시장이 주는 행운의 축제일 뿐, 손실을 막는 것만이 투자자의 진정한 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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