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치스러운 세상 속에 조금씩 희미해져 버린 영원이란 이름
내가 좋아하는 노랫말이 있는데,
‘사치스러운 세상 속에 조금씩 희미해져 버린 영원이란 이름’
그 이름이 바로 이 소설의 것 아닐까?
덧없음을 노래하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보람이나 쓸모가 없이 헛되고 허전하고, 갈피를 잡을 수 없거나 근거가 없는 것들. 그런 감정. 그런 존재. 그런 인생. 우리의 많은 것이 덧없다. 그리고 그 중에서 낭만과 사랑만큼 덧없는 것이 있을까.
사랑 사랑 사랑. 어딜 가도 사랑을 쉽게 입에 담는다. 어릴 적에 대중가요는 왜 죄다 사랑노래야?,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몰랐고, 지금도 잘 모르겠고, 앞으로도 알지 모르는 것을 왜 다들 찬양할까.
그러면서 왜 한편으로는 등한시할까.
사랑에 값어치를 매길 순 없지만, 우리의 삶에서 많은 것에 밀리곤 한다. 물론 반대로 정복되는 삶도 당연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것이 내 목숨을 지탱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더 중요한 것을 분명 찾아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느 날 해가 지는 곳만이 삶의 목적지가 된다면? 목숨과 존엄성을 위협 받으며 내일의 존재 유무를 걱정하는 날이 온다면?
오늘의 젊은 작가들의 글은 하나같이 위험하도록 날카롭다. 위험하도록 출렁인다. 그들은 현실과 극도의 괴리감을 제시하면서도, 현실과 분리되지 못한 우울함을 만면에 띈 채로 항해를 시작한다. 그들은 우리를 아주 먼 곳까지 이끌고는 가장 높은 파도에서 우리를 다시 현실로 떨어뜨린다. 이제 보니 그들은 그저 키가 아주 커서 발이 단 한 번도 현실에서 떨어지지 않은 것 같다.
위험한 세계와 우울한 전개, 비극적 혹은 모호한 결말. 이 표현은 그것에 대한 비난이 아니다. 그들은 어쩌면 그저 생각할 날들이 무수히 많기에 그렇다고 생각한다.
삶은 이런 것이다, 삶은 내 책과 같습니다. 내 글과 같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삶에 대해 아는 척하는 것만큼 지루하고 멍청한 짓이 없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저 우리를 현실로부터 아주 멀리까지 데려갔다가 다시 추락시키는 것이다. 그들이 계속 삶에 대해 말하고 있었음을 상기하도록, 무궁무진한 현실도피는 그래서 항상 다시 현실로 불시착한다.
아포칼립스는 모순적이게도 현실도피와 맞닿는다. 풍부한 상상력의 세계관이 제시하는 판타지는 갈수록 완전한 현실로부터의 도피를 꿈꾸며, 완전한 환경의 변화를 제공한다. 그런 작가의 세계 안에서 우리는 도리가 되어, 지나가 되어, 류가 되어 삶의 덧없음을 끊임없이 확인받는다.
이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가장 덧없는 것은 목숨이다.
하지만 작가가 선택한 화자는 끔찍한 현실 속에서 낭만과 추억, 사랑, 정의라는 덧없음을 어루만지는 어린 인물들이다. 눈곱만큼 하찮아진 목숨과 존엄성을, 그들은 서로에 대한 애정과 사랑을 통해 확인받는다.
덧없는 것은 무엇일까. 덧없는 것은 영원하기에 갈피도, 근거도 필요 없다. 영원의 이름은 그 자체로 덧없다. 오늘의 사치스러운 세상에서 영원은 점점 더 덧없어진다. 하지만 반대로 사치스러운 세상만큼 덧없는 것이 더 있을까. 우리는 영원이라는 이름을 잊지 않도록 계속해서 입 밖으로 사랑을 내뱉고, 기억하도록 애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