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 <회색 눈사람>
4. 존재하기 위하여; 안정
4.1. 반송편지
'외로움의 감옥'(37쪽)
너는 아주아주 외로운 사람이구나.
사실 사상과 정치적 신념보다는, 너무너무 외로워서, 얄팍한 관계와 그로 인해 드디어 굴러가는 일상이 너무 반가웠던 것 같다. 사상과 정치적 신념의 관계가 깊어 오히려 너무나 위험한 그 일을, 너는 알면서도 반가워했다.
지나와서 그들을 따라 읽었던 책 내용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 그러하다.
4.2. 먼지투성이
세상에 내 한 자리가 있다는 사소해 보이는 이 안온함은, 사실 없어서는 안 되는 인간으로서의 희망이다. 그 한 자리에서 주변의 사람들이 내 존재를 인식하고, 가끔은 필요로 하기도 한다는 것은 사람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쉽게 안심할 수 있는 버팀목이다. 그래서 오히려 바빠도 좋다……. ‘강’의 주말 없는 인쇄소에서의 삶은, 비틀어진 자취방에서보다 훨씬 일상답다.
그래서 그 상실을 ‘강’은 나름 깊이 앓았다. 사실 ‘강’은, 너무너무 외로운 사람이어서, 자신의 존재를 주었던 관계에 연연하게 된다. ‘강’은 오래도록 그 시기, "짧지만 일생을 두고 영향을 미치는 그러한 시기", 가장 뚜렷하던 자신의 존재의 흔적을 더듬는다. "아픔은 늙을 줄을 모른다."
그래서 ‘안’의 무리한 요구도, ‘김희진’을 돕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아니, 도저히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의 삶에서 분명 가장 컸던 자신의 존재가 그들에게는, 아주 작은 것이었으리라고 계속해서 자위한다. 감히 '우리'라 쉽게 칭하지 못하며.
외로움은 감옥이다. 스스로를 계속 그곳에 가둬두고, 반추하도록 하고, 잊지 못하게 하고, 그대로 늙어버리게 하는, 스스로 빚어낸 가장 두려운 감정이다. 그래서 ‘강’의 고백은 안쓰럽고도, 빛이 난다. 그녀가 스스로 존재했다고 느꼈다는 것만으로도, 외로움에 낸 상처에서는 늙을 줄도 모르고 빛이 새어나온다.
이런 존재를 읽는다는 것은, 내게는 가장 괴로운 일이다. 존재를 의식하며 읽을수록 내 심장 속의 그림자가 선명해진다. 왜냐하면 나는 그녀를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내 존재가 아주 선명하게 선명하지 않은 사람의 심장 속에 불시착하여 오래도록 처박히다 겨우 고개를 들면, 그 몸은 온통 먼지투성이이다. 왜 회색에는 항상 외로움이 따르는가.
어느 날, 문득 내 첫 근무지에서 일을 하다, 지루해했다. 하지만 이내 내가 느낀 지루함을 끔찍하다고 여겼다. 대학에 입학하고도 오래도록 일을 구하지 못하다 운 좋게 들어간 자리에서 2년가량을 일하며, 나는 이제 ‘자리’의 안온함에 깊이 파묻혔다.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하는 감각은 중독적이다. 세상에 내 한 자리가 있다는 사소해 보이는 이 안온함.
존재한다는 것은 괴롭다. 우리가 스스로 존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오늘도 존재는, 인정받는 것과도 같다. 내 존재의 기반이 얄팍함을 느낄 때마다 한없이 놓기 아쉬워진다. 아니, 정확히는 두려워진다. 나를 존재하게 한다는 이유만으로도 그것은 동시에 위협적이다. 그럼에도 존재하기 위해, 안온함을 추구하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추구할 것이다. 외로움과 안온함은 한 감방 안의 죄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