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소평가; 글에게 무엇을 내어줄 수 있는가?

토마스 만 <토니오 크뢰거>

by 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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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는 진정 고독하기에 예술을 창조하는가?


토니오 크뢰거에서 나는 문득 이분법적 사고에 불쾌감을 느꼈다. 토니오 크뢰거의 주제를 비롯한 여타 구성 요소들조차 모두 이분법적으로 구분할 수 있다. 시민과 예술가, 봄과 카페, 기쁨과 슬픔, 잉게와 토니오...


나는 예술은 재능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예술관 작품은 계속해서 예술가에게 남들에게는 없는 차별점이 있다고 주장한다. 세상으로부터 분리감을 느끼는 그들, 짙은 패배감에 펜을 드는 이들은, 정말 적어도 여타와 다른 정서적 예민함을 그 근원에 심어두었는가?


권성우 교수님께서는 식민지 시대 파시즘에 비평을 통해 저항한 임화를 진정으로 이룬 것은 고독이었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미루야마 겐지의 언급을 떠올리신다.


고독을 이길 힘이 없다면 문학을 목표로 할 자격이 없다. 세상에 대해, 혹은 모든 집단과 조직에 대해 홀로 버틸 대로 버티며 거기서 튕겨 나오는 스파크를 글로 환원해야 한다. 가장 위태로운 입장에 서서 불안정한 발밑을 끊임없이 자각하면서 아슬아슬한 선상에서 몸으로 부딪치는 그 반복이 순수문학인의 자세다.

(「소설가의 각오」 중에서)


교수님께서 심혈을 기울여 고르고 고르신 대목을 이렇게 복겨운 학생이 되어 슬쩍 옮겨오는 것에 대해 죄송스럽고, 감사하며...


고독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약간 소름이 돋는다. 내가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되뇌이는 것이, 나를 용서하기 위한 말이었음을, 어느 정도 깨달으며, 나는 내 위로 돋아난 감정을 다시 눌러내린다. 나는 고독을 감히 견디지 못하였다. 고독은 내게 언제나 견디기 버거운 공간이었다. 그 속에 영원히 빠지고, 나를 내어줄 자신이 없어서 어느 순간 글에 무심해진지 얼마나 지났는가. 이제는 오히려 창작보다 어느 대상에 기대어 해설하고, 설명을 다는 것에 편안함을 느끼고 있다. 비평가들조차 경계하는 형식주의를 내가 바로 행하고 있는 것 아닐까.


공부를 하며, 돈과 읽어주는 사람만 있다면 되는대로 무엇이든 쓰며 지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가능하면 죽을 때까지. 하지만 그러기 위해 나는 글에게 무엇을 내주었는가? 죽음조차 내주어야 글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어서 작가들은 고독을 바쳐 피와 살에서 글을 잉태시킨다. 그런데 감히 그럴 수조차 없는 나이기에 어떻게 글을 쓰며 죽음까지 함께할 수 있을까.


고독을 반기는 이조차 고독 속에서 안락하지 않다. 자주 고독하다고 해서 익숙해지지는 않는다. 글은 고통 속에서 나오는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모두가 예술가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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