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서랍을 정리할 때
오늘 동네에 비가 왔어요.
그래서 비 냄새, 밤 냄새, 나무 냄새를 맡으러 나왔어요.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물 냄새를 잘 맡는다고 들었어요. 어쩐지 그래서인가 계절이 바뀔 때면 나는 겨울 냄새, 비 내리기 전, 비 내린 후 땅 냄새를 곧잘 맡곤 해요.
오늘 동네에 가을비가 왔어요. 한차례 비가 훑고 가서 가을 낙엽도 우수수 떨어지고 낙엽 위에 빗방울이 고여있어요.
고요해진 저녁 시간 놀이터에 앉아서 나무 냄새를 맡아요.
머리에 맑은 공기가 들어온다는 신호를 받았어요. 머리가 맑아져요. 기분 좋은 공기가 머릿속으로 들어와 청소기라도 한바탕 돌리나 봐요.
세상에는 너무 익숙해서 알아채지 못하는 소중한 것들이 있어요.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자동 충전해 주는 몸의 시스템인 수면, 아침이면 수면 시간 기다려줬다는 듯 충전 마치고 늘 떠주는 햇살, 언제나 순환하는 공기, 알아서 바뀌어주는 계절과 피고 지는 꽃과 나무.
그 소중함을 이제 느껴요. 그 중에서도 요새는 따뜻한 햇볕.
긴 세월 겪었던 마음의 병으로 긴 시간 약을 먹으며 지냈더니 그 약이 몸 여기저기 영향을 주었나 봐요. 약을 끊고 났더니 몸이 너무 안 좋아지고 너무 힘들어졌어요. 그 약 기운을 빼느라 요새 너무 고생을 해요. 살이 20키로 찌고, 각종 호르몬 문제에, 몸이 여기저기 아프고 기운이 없어서 뭘 하려 해도 뭐하나 하기가 힘들어요.
그러다 아마도 제 몸이 저에게 말을 걸기를, 나가서 햇볕 좀 쫴봐. 라고 했던 게 아닌가 싶어요.
매일 오전 11시, 12시가 되면 이 도시의 빌딩 숲 틈 어딘가로 나가 조각조각 비추고 있는 햇볕 조각을 찾아요. 벤치가 없으면 맨바닥에 그냥 가만히 서서라도 햇볕을 쫴요. 하루 10분이라도 그렇게 햇볕을 쬐고 나면 한층 기분이 나아져요.
마음의 병을 고치려다 다른 몸의 병을 얻고, 이제는 몸의 병을 고치려고 여기저기 병원을 기웃대다가 한의원도 다니게 됐어요.
너무 억울하고 슬프지만 그래도.. 우리 몸과 마음에는 자정 작용이라는 게 있대요.
그래도 제가 달라진게 있다면 아프고 불안해서 엄청 바쁘게 도망 다니고 찾아다니고 숨어있고 억눌렀던 지난날에 비해 많은 것을 포기했다는 것이거든요.
아마.. 도망치고 찾아다니느라 정작 듣지 못했던 마음의 소리를 이제는 차분히 앉아 들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우리 마음에 1층, 2층, 3층 서랍이 있어요.
자주 쓰는 서랍, 가끔 쓰는 서랍, 아예 묵혀두고 잊고 지내는 서랍.
하나하나 고요한 시간마다 꺼내어 탈탈 털고 정리하다 보면 어쩌면 어떤 단서를 찾게 될지도 몰라요.
지난날의 제가 문제가 뭔지도 어디서 시작됐는지도 모른 채 답을 찾으러 다녔다면 이제는 어쩌면 정말로 진심 어린 제 마음을 마주하고 진짜 문제를 찾고 이해하고 그 서랍마다 새롭고 좋은 것들로 채워줄 수 있을지도 몰라요.
이제는 채워주는 대로 채우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채울지 말지, 어떻게 채울지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이 되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