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우를 나눠 준다는 것
누군가 나에게 사랑을 주는 쪽과 사랑을 받는 쪽 중 어떤 쪽이 익숙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받는 쪽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일단 임신이 어려웠던 엄마가 기적적으로 가진 외동딸이기 때문에 태생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은 나름대로 나를 엄하게 키웠으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마지막엔 결국 내가 원하는 대로 되곤 했다. 초등학생부터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무르익어 갈 때도 나는 고백을 하는 쪽보단 받는 쪽을 택했다. 일단 나에게 먼저 호감을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그 중 언젠가 내가 좋아하게 될 수 있을 만한 상대를 골라 만나곤 했다. 어떻게 보면 자신감이 없고 소심한 성격 탓일 수도 있는데 어쩌겠는가? 나는 사랑을 받는 것이 익숙하고 편하고 또 좋았다. 이 이야기에 반전이 있으려면 나 같은 사람에게도 마지막에는 운명적인 상대가 찾아오고 결국 내가 적극적으로 변하여 사랑에 빠져야 하겠지만 끝까지 반전 없이 나를 많이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
언젠가 사랑과 관련된 시 수업을 하다가 학생들과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나름대로 많은 종류의 사랑을 경험해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가장 와닿는 정의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하나 남았을 때 상대방에게 주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 말을 하면 먹을 것에 환장한 사람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또 틀린 말도 아니지만) 내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던 사랑은 키스도 포옹도 아닌 바로 저것이었다. 어릴 때 저녁 식탁에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올라오면 나는 늘 모자람 없이 먹었다. 지금 생각하면 엄마, 아빠의 젓가락이 덜 움직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서른이 넘어 내가 결혼을 한 지금도 엄마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바리바리 싸 들고 우리집 냉장고를 채워 넣곤 한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마음껏 먹게 해주는 것, 그게 엄마가 생각하는 사랑이었고 내가 받은 사랑이었다. 나의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결혼 전 데이트를 할 때 맛있는 걸 먹으러 가면 꼭 마지막 조각은 내 앞으로 왔다. 사실 우리 둘은 입맛이 달라 어쩌면 이러한 배려가 더 수월할 수도 있지만 언젠가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도 마지막에 나에게 내미는 모습을 보고 ‘와! 이 사람이 날 정말 사랑하는구나.’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남들이 들으면 웃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러한 그의 행동이 결혼을 결심하게 하는 데 나름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아이 갖기를 망설일 때, 나에게 가장 큰 걸림돌은 이기적인 내가 우리 엄마나 나의 남편이 나에게 준 만큼 내 아이를 사랑해줄 수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었다. 엄마의 둥지에서 떠나보낸 지 한참 된 지금까지도 나만 바라보고 사는 우리 엄마처럼 내 자식을 사랑해줄 자신이 없었고 약 십 년 동안 나에게 짜증이나 화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한 번도 내보이지 않은 내 남편처럼 내 자식을 위해 참아줄 자신도 없었다. 뭐 어떻게 하다 보니 결국 아이를 낳게 되었지만 아직도 '아기 대신 죽을 수 있어?'라는 극단적인 질문 앞에서 자신있게 '응!'이라고 대답할 자신이 없다.
얼마 전 우리 집에서 엄마와 남편과 나 이렇게 셋이서 점심을 먹은 적이 있다. 메뉴는 파스타였는데 나는 나름대로 계산해서 큰 새우를 인당 두 개씩 총 여섯 개를 넣어 만들었고 남편에게 그릇에 잘 나눠 담으라고 일렀다. 하지만 결국 내 그릇엔 새우가 네 마리가 담기게 되었다. 엄마와 남편이 각각 하나씩 내 그릇에 담았기 때문이다. 이날 나는 또 생각했다. 나중에 나는 내 딸에게 새우를 당연하게 양보할 수 있을까? 물론 그깟 새우 한 마리 나누어 주는 건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가능한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 양보가 의식하지 않은, 이미 체화된 사랑을 바탕으로 너무도 당연하게 나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혹시 나는 평생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닐까 싶어서 냉정한 스스로에게 서운함을 느끼기도 한다. 육아를 하면서 매일 나를 단련하듯이 나의 사랑도 점점 단단해지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