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덮인 삿포로

(그 겨울의 선율)

by 박경이

새하얀 설경이 펼쳐졌다. 마치 신이 하얀 캔버스 위에 정성스레 눈을 흩뿌려 한 폭의 작품을 완성한 듯했다. 하늘에서 내려온 눈송이들은 보석처럼 반짝이며 대지를 덮었고, 세상은 순백의 꿈속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삿포로의 하늘 아래, 차가운 공기가 폐 깊숙이 스며들었다. 몸이 움츠러들었지만, 그 순간마저도 여행의 일부였다 겨울은 조용히 다가와 우리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고, 차가운 바람은 계절의 존재를 선명히 각인시키듯 피부를 스쳤다.



훗카이도의 겨울은 마치 수채화처럼 은은했다. 비에이의 크리스마스트리는 그 수채화 속 한 점의 따스한 빛으로 존재했다. 끝없이 펼쳐진 순백의 대지 위에 서 있는 나무 한 그루. 어떠한 장식 없이도, 그 자체로 빛나고 있었다. 고요한 설원 속에서 오롯이 서 있는 나무를 보며, 때로는 화려한 것보다 담백한 것이 더 깊은 울림을 줄 수 있음을 깨달았다.


흰수염폭포는 그 이름처럼 하얀 포말을 뿜으며 힘차게 쏟아졌다. 얼어붙은 폭포와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공존하는 풍경은 자연이 빚어낸 예술 작품과도 같았다. 눈으로 덮인 계곡과 폭포가 한데 어우러진 모습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했다. 탁신관에서는 세월의 흔적이 깃든 일본식 건축미를 감상하며 차분한 시간을 보냈다. 오래도록 자리를 지켜온 목조 건물은 묵묵히 시간의 이야기를 품고 있었고, 은은한 온기가 그 공간에 남아 있었다. 마루를 밟을 때마다 들려오는 나무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며, 조용한 사색에 잠겼다.




여행의 즐거움은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만이 아니었다. 오타루 오르골당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시간을 거슬러 오래전 동화 속 한 장면으로 스며들었다. 따뜻한 조명 아래 빼곡히 놓인 오르골들은 마치 잠들어 있던 작은 요정들이 저마다의 노래로 우리를 맞이하는 듯했다. 손끝이 조심스레 태엽을 감아 올리자, 기다렸다는 듯 맑고 청아한 선율이 공기 속을 유영했다.

하나둘씩 쌓이는 음들이 공간을 가득 채우며 반짝였고, 그 울림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조용히 두드렸다. 잊고 지냈던 감성이 음악에 실려 깨어났고, 마음 한편 깊숙이 잠들어 있던 순수한 동심이 고개를 들었다. 작은 오르골 하나를 돌릴 때마다 그 안에 담긴 이야기가 소리결을 따라 흐르며 시간의 틈을 메웠다. 그 선율은 단순한 음악이 아니라, 지나온 순간들과 지금 이 순간을 하나로 엮어주는 다정한 속삭임처럼 느껴졌다.





맛있는 음식은 여행의 또 다른 언어였다. 단어 대신 향기로, 문장 대신 풍미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미각의 예술.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리는 부드러움은 마치 첫눈이 살포시 내려앉는 순간처럼 포근했고, 혀끝을 감싸는 깊은 풍미는 한 폭의 수채화처럼 서서히 퍼져 나갔다. 한 모금, 한 입에 스며드는 온기는 여행의 감동을 더욱 짙게 물들였고, 그 맛들은 우리가 지나온 거리와 풍경, 그곳의 온도까지도 고스란히 담아냈다.

달콤함과 짭짤함, 따뜻함과 얼큰함이 조화롭게 춤을 추며 우리의 미각을 사로잡았고, 우리는 그 순간을 한 조각씩 천천히 음미하며 추억 속에 차곡차곡 쌓아갔다. 여행이 시간이 아닌 감각으로 기억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 맛을 통해 삿포로의 겨울을 가장 선명하게 떠올리게 될 것이다.







이번 여행을 통해 깨달았다. 좋은 여행이란 지도 위의 목적지가 아니라, 함께 걷는 이와 그 시간을 어떻게 채워가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우리의 여정이 특별했던 이유는 그 길 위에 사랑하는 가족이 함께했기 때문이다. 마치 세심하게 조율된 오케스트라처럼, 모든 순간을 아름다운 화음으로 만들어 주었으니. 덕분에 우리는 불협화음 없이 오롯이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편안하고 즐겁게, 아무 걱정 없이 걸을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길을 정리하고, 작은 디테일까지 신경 써 준 가족의 배려가 이 여행을 한층 따뜻하게 빛나게 했다.

특히 이번 여행에서 딸이 정성스럽게 계획하고 만들어 준 소중한 기억들은, 마치 잘 보존된 오르골의 멜로디처럼 오래도록 마음속에서 울려 퍼질 것이다.



눈 덮인 삿포로를 뒤로하고 돌아오는 길. 창밖으로 흩날리는 눈송이들은 마치 또 다른 이야기를 속삭이듯 우리를 배웅하고 있었다. 언젠가 다시 찾을 삿포로의 겨울을 마음속에 품으며, 이 순간을 오래도록 간직하기로 했다. 이 여행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임을 알기에, 다시 마주할 그날을 기약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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