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보다 어둠이 먼저 말을 걸어올 때
가을 끝자락에 서면, 해가 참 성격이 급해진다.
오후 다섯 시만 넘어도 슬슬 짐 싸는 분위기다.
고개를 휙 돌리며
“나는 간다, 너희는 알아서 해라”라고 말하는 듯.
덕분에 퇴근길은 어쩐지 엄숙하고, 나도 모르게 걸음이 느려진다.
밝을 때는 미처 보지 못한 내 마음이 어둠 속에서 슬며시 고개를 내미는 시간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예전엔 어둠이 내려오면 마음도 가라앉곤 했는데,
올해의 나는 오히려 어둠이 내리는 길에서 조금 더 솔직해진다.
낮에는 튼튼해 보이던 마음이
저녁이 되면 갑자기 “그… 사실은 말이야…” 하며 속삭이는 것이다.
며칠 전,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은행잎이 하나씩 떨어지는 모습을 멍하니 보았다.
이제 낙엽 하나가 떨어져도 괜히 의미를 찾는 나이가 되었다.
'저 잎도 하루 종일 버티다가 이제 집에 가네…'
이런 생각을 하며 괜히 동지의식까지 느꼈다.
어둠이 빨리 찾아오니 자꾸만 마음도 끌려 나온다.
미뤄두었던 미안함 하나,
조금 덜어내야 할 집착 하나,
그리고 어제 괜히 혼자 삐쳤던 일까지.
낮에는 ‘괜찮은 척’이 통하지만
저녁엔 그게 잘 안 된다.
저녁은 참 정직해서, 숨겨둔 감정들을 슬며시 들춰낸다.
하지만 또, 저녁은 생각보다 너그럽다.
어둠 속에서 보면
내가 못난 것도, 잘난 것도
그렇게까지 대단한 일이 아니게 느껴진다.
빛이 너무 밝으면 작은 흠도 잘 보이지만
저녁의 어둠은 그런 것쯤은 대충 덮어주는 법이다.
그래서일까.
저녁길을 걸으면
어쩐지 ‘오늘의 나’가 조금 더 괜찮은 사람 같아진다.
가끔은 이런 생각도 든다.
‘해가 이렇게 빨리 지는 건,
나보고 천천히 좀 살라는 가을의 잔소리 아닐까?’
가을은 계절 중 유일하게 말을 걸어오는 느낌이 있다.
봄은 정신없고, 여름은 뜨겁고, 겨울은 싸늘한데
가을만큼은 슬며시 묻는다.
“너, 괜찮아? 속마음은 어디까지 알고 있어?”
그리고는 어둠을 조금 일찍 내려
차분히 대답할 시간을 준다.
어둠 속 골목을 지나 집에 가까워질수록
머릿속의 복잡한 생각들도 하나둘 정리된다.
오늘은 조금 지친 마음,
내일은 조금 가벼운 마음,
가끔은 별것 아닌 감정이
어둠 속에서 새 모양을 갖추어 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