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이 길이 되는 곳에서

겨울 제주, 동백 앞에 서다

by 박경이

겨울의 제주에서 꽃을 만났다.

계절을 거슬러 피어난 꽃이 아니라,겨울이라는 시간 안에서

가장 자기다운 얼굴로 서 있는 꽃이었다.

카밀리아힐에 들어서는 순간, 여행자가 아니라 잠시 멈춘 사람이 되었다.

입구의 돌담은 말이 없었고 돌하르방은 표정 없이 서 있었지만

그 무표정 속에는 오래된 환대가 담겨 있었다.

머플러를 두른 돌하르방을 보며 제주는 늘 이렇게 사람을

웃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하지 않게, 그러나 충분히 따뜻하게.





아치형 문을 지나자 동백이 길이 되었다.

홍의 동백, 연분홍의 동백, 마치 각자의 사연을 가진 얼굴들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한자리에 피어 있었다.


동백은 꽃잎을 흩뜨리지 않는다.

자기 몫의 시간을 다 살고 난 뒤 한 송이 그대로 떨어진다.

그래서인지 이 꽃을 보고 있으면 버티는 삶이 아니라,

품위 있게 머무는 삶을 떠올리게 된다.


이 길에서는 걸음이 자꾸 느려졌다.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다는 허락을

꽃들이 먼저 건네는 것 같았다.

바쁘게 살며 늘 앞만 보던 나에게 동백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이 속도로도 충분해요.”






정자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른다.

바람은 나뭇잎을 흔들며 말을 걸고 햇살은 꽃잎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앉는다.

이곳에서는 자연조차도 큰 소리를 내지 않는다.

모두가 서로를 배려하듯 낮은 목소리로 존재한다.


안내도를 바라보다 문득 생각했다.

우리는 늘 어디쯤 와 있는지를 확인하며 산다. 지도 위의 점 하나처럼ᆢ

내가 지금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를 묻는다.

카밀리아힐에서는 그 질문이 조금 느슨해진다.

‘어디까지 왔는지’보다

‘어떻게 걷고 있는지’가 더 중요해진다.


한옥의 문을 지나며 바라본 동백 정원은 마치 오래된 편지 같았다.

읽지 않아도 마음이 먼저 알아보는 문장들.

동백꽃은 화려하게 자신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피어 있음으로 충분하다.


‘Healing’이라는 글자를 만났을 때 나는 그 단어가 가진 무게를 다시 생각했다.

힐링은 특별한 무언가가 아니라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지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이곳에서는 그저 걷고, 서고,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조금씩 풀어졌으리라.


연못 위에 떨어진 동백을 보며 삶의 어떤 장면을 떠올렸다.

애써 붙잡지 않아도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내려놓게 되는 것들.

그 내려놓음조차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동백은 조용히 보여주고 있었다.


온실 안은 또 다른 계절이었다.

겨울 밖의 시간을 잠시 밀어내고 초록이 숨 쉬는 공간.

사람들도 그 안에서는 말수가 줄어든다.

식물 앞에서는 누구나 겸손해지니까.




길의 끝에서 다시 만난 넓은 정원.

억새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동백은 제 자리를 지킨다.

각자의 방식으로 계절을 견디는 모습이 묘하게 닮아 있었다.


카밀리아힐을 나오며 이곳이 꽃을 보여주는 정원이 아니라

삶의 호흡을 가르쳐주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빠르게 피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머물다 제때 물러나는 것.


말없이 피어 있는 동백 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지금의 속도를 믿어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