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벗#2 피아노

반려악기

by 해이나

내 인생에서 맨 앞의 7년을 제외하고 피아노는 언제나 내 옆에 있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피아노를 엄청 잘 치는 사람으로 오해를 하시던데, 별로 잘 치지는 못한다. 그냥 오래 쳤다는 것뿐이다. 잘 치는 것과는 별개의 이야기다.

처음 배운 것은 초등학교 1학년 때이다. 엄마의 손을 잡고 곧 쓰러질 것 같은 작은 피아노 학원에 들어갔다. 첫날, 오른손 엄지손가락부터 새끼손가락까지 순서대로 1,2,3,4,5를 쓰고 손가락 번호에 맞춰 움직이는 것을 배웠다. 다음날 왼손을 배우기로 약속했는데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 오늘 배운 것을 왼손에 적용시켜보면 새끼손가락이 1번이어서, 손바닥을 뒤집어서 쳐야 된다는 결론이 나왔다. 손바닥을 뒤집어서 움직여 보았는데, 뒤집고는 피아노를 칠 수 없을 것 같았다. 밤새도록 걱정을 했다. 다음날 학원에 가보니 왼손도 엄지손가락이 1번이어서 뒤집지 않고 그냥 치면 되었다. 어휴! 다행이다.

'인어의 노래'라는 곡을 집에서 연습하던 날, 엄마가 말씀하셨다. "와~ 너 정말 잘 친다."

나는 나오다 말고 다시 피아노방에 들어가 '인어의 노래'를 더 쳤다. 그 다음날도, 그다음 주도. 피아노 학원에서는 새로운 곡으로 진도를 나갔지만, 집에 와서는 계속 '인어의 노래'를 연주했다. 연습 후에는 방문을 열고 나와서 잠시 서있곤 했다. 엄마가 또 칭찬해 주기를 기다리면서... 안 해주셨지만 해주시기를 기다렸다.

5학년 즈음, 갑자기 방송국이 우리 초등학교를 방문해서 학교 촬영을 한다고 하셨다. 한달 뒤에 있을 방송 출연을 위한 합창단이 급조되었고, 노래를 부르러 합창단에 들어갔다. 어느 날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합창 반주를 하던 6학년 언니가 못하게 되었고, 평소에 이 곡이 맘에 들어 연습해 놓았던 내가 피아노 반주를 하게 되었다. 그때 혜성처럼 나타나 반주를 훌륭하게 소화해 낸 믓찐 나에게 반한 어떤 남자아이가 선물을 사들고 고백한다고 쫓아와서 도망 다니느라 힘들었다.

중학생이 되어서는 예배 반주를 하게 되었다. 피아노 학원을 끊었는데 예배 반주를 하라니. 나는 반주를 할 수 있는 실력이 아니라고 펄펄 뛰었지만 엄마의 뜻을 어기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5년 동안 교회에서 틀릴까 봐 전전긍긍하며, 부끄러워하며 반주를 했다.

세상 어디를 가도, 중학교에서도 고등학교에서도, 나보다 피아노 잘 치는 친구들은 늘 있었다. 어디가서 명함을 내밀 주제는 못되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치다보니 정이 들기 시작했다.


고등학생이 되면서는 맘에드는 악보를 구해와서 테이프를 들으며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베토벤의 월광 전곡, 슈베르트의 마왕 반주 등 어디에선가 들어본 곡들의 악보를 악기상에 가서 구해왔다. 도서관에가서 복사해오기도 했다. 아름다운 곡들의 정돈된 선율이 마음에 위로를 주었다. 가끔은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를 푸느라 악보와 상관없이 때려 부시는 연주를 하기도 했다. 쇼팽의 곡을 연주하며 이런 대가의 음악을 흉내낼 수 있다는 것에 만족감을 느끼기도 했다. 엄마가 좋아하는 가요의 악보를 구해오셔서 나보고 반주를 해달라고 하실 때도 있었다. 내가 연주하면 엄마는 피아노 옆에서 노래를 부르셨다. 평온한 시간이었다.

고향을 떠나 낯선 도시에 있는 대학교에 오게 되었다. 드디어 피아노 반주를 안 하게 되었다고 좋아했다. 그런데 새로 다니게 된 교회에 반주자가 필요하다며 반주를 해달라고 하셨다. 그냥 지나가는 말로 고향의 교회에서 피아노 반주를 했었다고 말한 것이 화근이었다. 나는 실력이 부족하고 전공자도 아니어서 반주를 할 수 없다고 버텼다. 하지만 결국은 하게 되었다. 그렇게 지금까지 20년 동안 피아노 반주를 더 하게 되었다.

굳이 피아노를 계속 치려고 했던 건 아닌데 피아노를 쳐야만 하는 일들이 생겨서 어쩌다 보니 피아노와 오랫동안 동행하게 되었다. 반려 악기가 되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인생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버린 피아노는, 지금은 인생을 풍성하게 만든 뗄래야 뗄 수없는 무게감을 가지게 되었다. '피아노'라는 글자가 들어가면 영화도 다 챙겨서 보게 되고, 책도 읽게 된다. 유명 피아니스트의 곡들을 찾아서 듣게 되고, 쉽게 편곡된 곡들이 있으면 쳐보기도 한다. 더 나아가 피아노가 반주하는 다른 모든 악기에 대해서도 관심이 생긴다. 그 곡을 작곡한 작곡자도 알고 싶어지고, 그 작곡가의 인생도 궁금해진다. 그렇게 음악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늘어난다.

무엇보다도 힘들고 어려운 일로 마음이 괴로울 때, 공황 상태가 지속되거나 생각이 너무 많아 끊어내야 할 때, 내 손가락 끝에서 울려 나오는 단정한 화음들은 어떻게든 버틸 힘을 주곤 한다. 이 곡을 작곡한 위대한 음악가들의 평탄치 않았던 인생을 생각하며, 그들은 역경에 무너지지 않고 결국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었음을 기억하며, 나 또한 그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곤 한다. 그래서 자녀에게도 악기를 잘 하지 않아도 되니, 오래만 꾸준하게, 포기하지 말고, 가끔씩이라도 손에 잡으며 끝까지 함께 하자고 독려한다. 반드시 너에게, 너의 인생에 큰 위로와 힘을 줄 거라 말한다.

우리집에는 초등학교 1학년부터 나와 함께한 그 까만 피아노가 연주를 기다리며 조용하게 존재감을 빛내고 있다. 내가 더 이상 칠 수 없을 때에 딸들 중 음악에 위안을 받는 아이에게 주려고 한다. 어쩌다가 함께 온 피아노는 이제 딸에게 줄 첫번째 유산이 되었다.


피아노를 놓지 못하게 막았던 수많은 우연에게 감사하다.

아닌가? 아마도 필연인 듯하다.

아니다. 축복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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