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고래 숨쉬기(220916)
안녕! 키티!
안네의 일기장의 이름이 키티여서 나도 너의 이름을 키티라고 붙여보았어.
써보니 내가 좀 미친 듯하다. 40대 아줌마가 일기장도 아니고 일기에 이름을 붙여서 부른다는 것.
최근에 내가 정신나간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까 염려가 되었던 적이 있었어. 고려대 안암 병원에 스타벅스가 새로 생겼거든. 스타벅스 앞에 작은 정원이 있는데 지대가 높아서 주변풍경도 보이고 바람도 잘통하고 한적하기도해서 앉아 있기가 참 좋아. 며칠전 저녁에 그곳을 지나가다가 빈 의자에 앉아서 큐브를 40분 정도 맞췄어. 잘 맞추는 것도 아니고 떠듬떠듬. 모르는거 유투브에서 찾아가면서. 누가 봐도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거 같다 싶었는데, 뭔들 어때. 내가 요즘 하는 게 과거에 안해본 거 하는 거거든. ㅎㅎ
실은 오늘도 내가 입고 싶은 옷 막 입고 나갔어. 내가 항상 입고 싶은 옷은 티셔츠에 청바지야. 티셔츠는 바지 속에 넣어서 살짝만 빼구. 하지만 출근을 할 때에는 젊은 척하는 아줌마로 보일까 봐 그렇게 입지 못했었어. 내가 패션감각이 매우 떨어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나이에 맞으면서 직장인으로 보이는 옷을 입으려 애를 썼지.
하지만 오늘은 아니야. 두툼한 아랫배가 신경쓰이긴 하지만 뭐 어때. 오늘 나는 '누구의 무엇'이 아니잖아. 난 그냥 '나'이어도 되거든.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다닐거니까, 아랫배가 좀 나온 아줌마가 젊어보이는 척하며 옷을 입고 나온 걸로 보여도 괜찮아. 잠시 눈살을 찌푸리고 얼른 고개를 돌리겠지.
키티! 그런 이유에서 오늘은 너의 이름을 불러가며 일기를 써볼까 해. 누가 왜 그러는 거냐고 물어보면 갱년기 소녀감성이라고 하지 뭐.
키티. 오늘 아침엔 좀 우울했어. 아이들 아침을 제대로 먹이지 못했거든. 내가 숨쉬기 위해 휴직을 한다고 했지만 가정에서 내 역할을 소흘히 할 생각은 전혀 없었어. 그런데 휴직한지 2주만에 아침밥을 안 주다니. 이럴 수가! 내가 나에게 실망했지.
생각해보면 주부이셨던 우리 엄마도 가끔은 아침밥을 안주셨는데, 난 그것에 별로 개의치 않았거든. 그런데 난 왜 죄책감이 드는 걸까.
오늘은 약수역에 있는 병원에 진료를 받으러 가는 날이야, 원래는 병원진료를 보고 북촌한옥마을에 가려고 했거든. 그런데 마음에 힘이 없어서 못가겠더라구. 자식들 아침밥도 안 주면서 북촌으로 놀러가는거냐? 그러고도 니가 엄마냐? 뭐 이런 소리가 들리더라구.
중구 화단
키티. 진료를 마치고 집으로 걸어가는데 광희초등학교 옆의 화단이 눈에 들어왔어. 친절하게도 식물의 이름표까지 세워놓았더라고. 중구에서 한건지, 광희초등학교에서 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참 좋더라. 평소 식물의 이름이 궁금해서 다움의 꽃검색을 종종 이용하는데, 꽃검색만 되고 풀은 안되었거든. 오늘 몇가지 식물이름을 배웠어.
사초/노루오줌(뿌리에서 노루 오줌 냄새가 난다 해서)/옥잠화(=옥비녀꽃, 꽃이 옷비녀를 닮아서)
신당역 역무원 살인 사건
키티. 광희초등학교 옆 지하철을 의식없이 바라보다가 뭐가 잔뜩 붙어있고 꽃다발이 놓인 것을 보았어.
이게 뭐지???? 아~ 맞다!
20대 신당역 역무원이 평소 스토킹 당해서 신고했던 남성에게 칼에 찔려 죽은 사건이 있었어. 여기가 신당역이었던거야.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꽃한송이 가져올걸.
젊디 젊은 20대의 나이에 3년 동안 스토킹을 당하는 것도 힘들었을텐데 얼마나 무섭고 아팠을까. 내 마음도 여기에 잠시 내려 놓았어. 관련 법이 개정되고 피해자의 억울함이 꼭 풀리기를.
서울 동관왕묘
터덜터덜 걷는데 갑자기 다른 길로 걷고 싶어졌어. 그래서 신당역을지나 오른쪽으로 꺾었어. 그런데 걷다보니 동묘시장이 나오더라구. 그리고 신기하게도 동묘공원입구가 떡 하니 나오는 거야. 동묘공원은 담장이 옛스럽고 담장 안 나무 뒤로 보이는 기와지붕과 어처구니가 궁을 연상케 해. 지나갈 때마다 '여기는 도대체 어떤 공간인가?' 궁금하곤했어. 오호! 오늘 나의 궁금증을 해소하겠군. 들어가야겠다.
서울동묘공원은 정식명칭이 '서울동관왕묘'야. 신기하게도 중국의 장수인 관우의 조각상을 두고 제사를 드리는 곳이네.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명나라의 요청으로 선조때 지었다고 해. 우리나라에 관우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인 무묘가 많이 있는데, 그 중 여기 동관왕묘가 제일 규모가 크고 화려하다고 해.
나름 신기하고 재미있었는데, 관리가 잘 되는 곳은 아닌듯하여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어. 멋진 나무들도 있었고, 황금빛으로 빛나는 관우상도 나름 괜찮은 거 같은데, '역사적 가치를 지닌 곳'이라는 안내판과는 달리, 조명이 어두워 안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고, 다른 건물안에 커다란 북 같은게 있는데 막아놓아서 제대로 볼 수 없었어. 여기저기 눈에 띄는 어울리지 않는 소방시설들과 '노상방뇨금지', '흡연 금지' 표식까지. 아. 사람들이 여기에서 담배피고 노상방뇨하나보다. 그래서 입구에다 여기에는 화장실이 없다고 크게 써붙였나? 이런 생각도 들더라구. 내가 역사와 행정에 대해서 잘 모르기는 하지만, 문외한인 내 눈에는 조금 아까워보였어.
키티. 오늘도 참 감사한 하루야. 오늘은 병원만 갔다와야겠다 했는데, 다닌 곳이 꽤 되네. 지금 둘째에게 저녁을 먹이면서 이 글도 다 써가. 아침을 못먹인 죄책감에 에어프라이기에 감자랑 밤을 굽고, 고기만두랑 새우만두도 내놓고, 삼각김밥 만들어 주고, 배도 하나 깎아 주었어. 뭘 더 해줄까 했는데 배가 부르다고 하네.
둘째가 요즘 중간고사기간이라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어. 자꾸 배가 아프다고 그러네. 나도 겪은 시절이지만, 다시 하라 하면 아무생각없이 열심히 하겠지만, 내 딸이 고생하는거 보니 안쓰러워. 하지만 고난이 사람을 강하게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는 것을, 그것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다는 것을 알기에, 학창시절 열심히 공부하고 스트레스 받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첫째와 둘째가 이 시기에 최선을 다해서 더 강한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바래.
오늘 내 이야기 들어줘서 고마워.
오늘의 걸음: 14,220보
읽는 책: 그리스사
운동: 필라테스 1시간